겨울에서 봄, 3개월 간 유럽여행의 시작
어린 시절 내 세상은 가파른 비탈길 좁은 골목 동네가 전부였다. 초등학교에서 친구를 사귀면서 옆 동네를 지나 도시에서 도시로 영역을 넓혔다. 길을 잃어 지나가는 아저씨에게 울먹이며 길을 물었던 기억이 난다. 동전이 없어 공중전화 긴급통화로 엄마한테 전화했던 적도 있다. 그렇게까지 헤매가며 가본 적 없던 길을 가는 이유는 뭐였을까. 아마도 우리 동네에는 없는 재밌는 무언가 있던 것 같다.
그때의 경험이 우리가 여행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건 아닐까. 높은 곳에서 용감하게 뛰어내린 기억. 미지의 영역에 한 발짝 앞으로 나섰을 때 두근거림. 새로운 것을 마주했을 때 느끼는 벅찬 감정까지. 모든 것들이 다음날 친구들에게 자랑할 모험담이었다.
할 줄 아는 게 많아지고 배움이 깊어질수록 세상은 더 크게 다가왔다. 조경을 공부하면서 자연스럽게 산과 강을 다닐 기회가 많았다. 식물, 풍경을 사진으로 찍고 보는 것이 즐거웠다. 졸업 후 생태의 다양성, 자연의 순환과 균형을 연구한 덕분에 자연과 공존하는 삶의 태도를 갖췄다.
세상엔 다양한 삶의 방식, 아름다운 것들이 너무나 많다. 그것들을 나만의 시선과 언어로 여행 이야기를 하고 싶은 꿈을 가졌다. 10년이 지나 결혼을 하고 직장을 다니며 평범한 일상이 주는 행복을 얻었지만 세계여행은 늘 가까이에 품고 있었다. 어렸을 적 동네 밖을 나왔을 때처럼 일상의 문턱을 넘어 내 세상을 조금 더 넓히고 싶다. 두 번 없을 후회 없는 선택을 하자. 가본 적 없는 길은 잃을 길도 없다.
"우리가 세계여행을 가게 되면 베를린에서 시작하자"
세계여행을 꿈꾸던 나는 틈만 나면 베를린 노래를 불렀다. 그 많은 도시 중에 왜 베를린이었을까.
10년 전 한 달 남짓 혼자 떠난 베를린에서 느낀 감정은 다른 도시를 여행할 때와는 무언가 달랐다. 그때는 그게 어떤 느낌인지 모른 채 흐릿한 기억을 남기고 돌아왔다. 다시 한번 베를린에 갈 수 있다면 그때의 느낌을 문장과 사진으로 뚜렷하게 새길 거라 다짐했다. 이제는 혼자가 아닌 둘이서 여행의 감정을 나눌 수 있다.
베를린은 도시 그 자체로 성숙한 태도가 녹아있다. 전쟁의 역사를 덮어두지 않고 베를린 장벽, 체크포인트 찰리 등 역사적 흔적들을 도시 곳곳에 드러내 성찰의 메시지를 남겨놨다.
도시는 보행로, 자전거도로, 차도가 최소한의 시설로 명료하게 구분되어 순서대로 안전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음이 느껴진다. 대지의 위아래로는 S-bahn과 U-bahn이 교차하고 수직, 수평으로 얽히고 짜여 도시의 구조적인 틀을 갖췄다.
너무나도 정교하게 설계된 도시구조로 인해 도시의 인상은 경직되었을 것 같지만 그 틀 안에 들어가면 흥미로운 경험을 할 수 있다. 벽의 빈 공간을 두고 볼 수 없는 낙서들, 약간의 위험이 동반된 어린이 놀이터, 도시경관을 위해 절제된 안전펜스 등 개인의 책임이 녹아든 사회적 규범 안에서 시민의 자유와 다양성을 존중하고 변화의 한편을 남겨둔 유연함을 가졌다.
10년 전 기억을 이 도시는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 가지 않은 겨울의 추위와 코로나 팬데믹,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해 도시는 움츠러들어있었고 강풍을 동반한 잦은 비는 도시를 잿빛으로 물들였다.
긴 여행의 문턱 위에 놓인 우리의 마음도 바짝 얼어붙었지만 도시 곳곳을 걸어 다니며 보통의 일상을 즐겼다. 공원에는 한가로이 반려동물과 산책하는 사람들이 모여있다. 마트, 카페, 공공장소 어느 곳도 예외 없이 반려동물과 함께 다니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어 좋았다. 비록 옷깃을 여미고 어깨에 힘은 바짝 들었지만 베를린의 일상을 걸으니 마음만은 사르르 녹는 것만 같다. 배가 고파지면 벤치에 앉아 딱딱한 빵을 뜯으며 여행의 맛을 느끼고 서서히 감정을 풀어갔다.
베를린에 온 지 일주일이 지났다. 낯선 사람들, 다른 언어, 이질적인 도시, 그 모든 것들이 비일상적인 환경 속에서 길을 걷고 장을 보며 일상을 여행했지만 과거와 달리 여행의 기쁨에 둔감해진 것일까. 트램이 지나는 거리의 풍경, 낙서로 가득한 도시의 얼굴들을 봐도 더 이상 새롭지 않다.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고 무덤하다. 당황스럽다.
적지 않은 나이에 많은 것을 감수하고 도망치듯 떠나온 여행이라 그럴까. 그동안 나이가 들어서 감정이 무뎌진 탓일까.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이유가 있겠지만 아마도 감정이 열리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오래 숙성된 와인과 위스키가 고유의 맛과 향이 열리려면 공간과 시간이 필요한 것처럼.
마음의 공간이 가득 차 외부의 자극을 받아들일 여유가 부족한 것 같다. 몸은 떠나왔지만 마음 한 구석엔 여전히 때 묵은 감정의 잔재들이 물음표를 남긴 채 쌓여있다. 이제 오래 묵혀뒀던 생각들을 덜어내자. 성숙한 만큼 깊어진 감정의 스펙트럼을 천천히 열어가자고 스스로 위로했다.
어제는 조금 쌀쌀한 거리를 걷다가 길거리 볶음국수를 벤치에 서로 바짝 붙어 앉아 포크 하나로 지수와 나눠먹었다. 바닥까지 싹싹 긁어먹고 나니 이제야 여행 온 것 같은 느낌이 들기 시작한다. 빈 누들박스 밑바닥 포장 맺음새를 보고 있으니 묵었던 생각들을 덜어낸 흔적처럼 보였다. "이제야 여행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툴툴 털듯이 말했다. 지수는 나지막이 대답했다.
"때로는 예상치 못한 곳이 여행의 트리거가 될 수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