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엄한 대지, 번글래스

가늠할 수 없는 아득함을 마주했을 때 밀려오는 경외감

by nomadhaus

아일랜드 최북서쪽 도니골 지방 작은 동네인 미나더프에 온 계기는 단 한 가지 이유다. 여행 시작 전, 구글지도를 보다가 거대한 해안 암석 지형인 번글래스를 발견했고 반드시 가보고 싶다는 호기심이 발동했다. 지구 반대편 10,000km를 넘어 섬나라, 그것도 모자라 그중에서 가장 외진 이곳까지 단순한 호기심에 끌려 올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는데, 지금 그곳에 발을 딛기까지 1km도 남겨두지 않고 있다.

낮고 진하게 깔린 먹구름과 온종일 내리는 비로 인해 번글래스로 가는 길녘 살몬리프(Salmon leap)에는 쏟아지는 계곡물이 천둥처럼 부서져 흐른다. 매일을 이곳 푸드트럭의 커피 한 잔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오늘은 날씨가 좋지 않았지만 그 땅이 어떻게 생겼는지 두 눈으로 봐야만 마음이 편할 것 같다.


부푼 기대를 안고 해안절벽 외곽을 따라 올라 입구에 도착한 순간 여기가 어딘지 분간할 수 없을 만큼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짙은 안개가 무겁게 깔렸다. 내리는 빗줄기에 안경은 더 이상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쓰나 벗으나 어차피 안 보이는 건 마찬가지. 안경을 접어 넣고 오랜만에 얼굴을 해방시켰다. 오직 보이는 것은 눈앞에 풀밭과 비에 젖은 양 몇 마리, 그리고 흐릿하게 보이는 사람들의 실루엣뿐이었다. 모든 것이 신비로워 보였다.

한참을 올라 뷰포인트에 도착했을 때도 여전히 안개는 짙고 낮게 깔렸다. 눈앞에 바다가 있는지 절벽이 있는지 도무지 보이지가 않았다. 세찬 바람에 안개가 조금이라도 걷히길 기대했지만 안개는 조금도 물러설 생각이 없어 보인다. 우리의 첫 번째 번글래스는 신비로운 분위기만 남긴 채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비가 그치고 먹구름이 개인 날, 날씨는 조금 흐렸지만 하늘은 분명히 높아졌다. 이 번에는 볼 수 있겠지. 부푼 기대를 안고 다시 한번 해안길을 올랐다. 이 전과는 분명히 다른 넓은 시야가 펼쳐졌다. 다시 걸은 길 바로 옆은 놀랍게도 족히 100~300m 높이의 절벽에 대서양이 바로 앞에 있는 듯 웅장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여기가 우리가 걸었던 그 길이 맞을까? 가슴이 두근거렸다. 믿기지 않는 심정을 안고 발걸음을 서둘렀다.

드디어 번글래스를 마주했다.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아득한 해안절벽이 우리 눈앞에서 장엄한 자태를 드러냈다. 그 압도적인 자연의 힘 앞에 무력한 외마디 탄성을 내지를 수밖에 없었다. 저 멀리 절벽 마루 끝자락에 개미처럼 보이는 점들은 미약한 존재의 사람들이었다. 감당할 수 없는 대자연을 마주했을 때 어찌할 바를 모르는 이 무력한 감정이 경외감이라는 것을 여기에 와서야 정의를 내려본다.

단순한 호기심에 이끌려 먼 길을 떠나와 여행의 최종 목적지에 두 발로 섰을 때 비로소 이 여행에 정점을 찍었다고 느꼈다. 형언할 수 없는 벅찬 감정들이 밀려 들어온다. 누구 하나 의지하지 않고 오로지 두 사람의 힘으로 여기까지 왔다. 지금껏 수없이 교차했던 감정들은 이 땅에 서기 위한 댓가였을지도 모른다. 나는 여기에 있을 자격이 있다. 여행에서 느꼈던 기쁘고 슬픈 감정들 모두 다 내 거다.

이제 다시 돌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동안에 여정을 차례대로 떠올리며 오늘의 감정까지 이어서 내 마음속에 깊게 새겼다. 남은 여정도 무사히 마무리 짓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마음의 준비를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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