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나라, 열여섯 개의 도시, 두 계절을 지나온 삼 개월의 여정
2022년 2월 중순, 눈 녹기도 전에 도망치듯 떠나온 여행은 새순이 돋아나고서야 끝이 났다. 베를린에서 아일랜드까지 여섯 나라, 열여섯 개의 도시를 지나 여든세 차례의 일기와 만여 장의 사진으로 여행은 기록됐다. 끝이 보이지 않았던 석 달간에 긴 여정은 어느새 마침표를 찍었고 집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지친 몸을 실었다.
겨울에서 봄, 뒤 섞인 두 계절 사이를 표류했다. 떠나오는 동안 수많은 감정들이 교차했다. 벅차오르는 감정, 스스로를 보듬는 마음, 때로는 나 자신을 괴롭히던 지친 마음까지. 그 모든 것들이 모여 더없을 기쁨으로 다가왔다. 그렇게 새겨진 흔적들은 장대한 파노라마가 되어 하나로 이어졌다.
베를린에서 움츠러든 몸과 가라앉은 감정을 어쩔 줄 몰라 힘겨웠던 기억들이 아직도 선명하다. 눈 내리는 프라하의 대초원에서 보낸 시간은 조금 우울해도 괜찮다며 여행이 마냥 즐거울 순 없다고 위안이 됐다. 덕분에 힘을 얻어 끝이 보이지 않던 이 여행을 완주할 수 있었다. 알프스를 넘어서 베네치아의 수로와 골목길을 따라 빨래들 사이를 다니고 나서야 허리를 곧게 세우고 주변을 돌아볼 마음의 여유를 찾았다.
토스카나 지방의 따사로운 햇살 아래 올리브 숲길을 따라서 얼어붙었던 감정들이 눈 녹듯 풀렸다. 프로방스 지방을 누비며 타오르는 하늘을 등지고 거센 바람을 맞섰을 때 두 발로 당당히 설 수 있었다. 비로소 우리 앞에 놓인 여정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여행자의 마음을 갖췄다.
아일랜드의 가늠할 수 없던 아득하고 거대한 대지 안에서 작디작은 우리 존재를 발견하고 벅차오르는 감정과 경외감으로 가득한 여행을 했다. 양 떼 초원 사이에 덩그러니 놓인 집에서 밥을 지어먹고 벽난로 앞에서 불을 땔 때 일상의 소중함을 깨달았다. 우리의 삶은 너무나 소중하고 다치기 쉬우니까 늘 보살피고 가꿔가야 한다. 돌아오는 날 더블린의 춤추던 아저씨가 아직도 아른하다. 중학교 동창 W의 가르침 덕분에 그를 존중할 수 있었다. 우리는 더디지만 부지런히 성장하는 존재다. 10년 전 베를린의 버스킹 기타 연주자로 시작된 여행의 시선은 더블린의 춤추는 관객에게 돌리며 끝맺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잠시 머물렀던 헬싱키에서 또다시 혹독한 추위를 맞이하니 베를린에서 지냈던 시간들이 떠오른다. 겨울과 봄 사이, 여행의 시작과 끝이 겨울로 맞닿아있는 것이 어쩐지 조금은 슬프기도 하고 반갑기도 하다. 다만 이 추위가 몸을 움츠러들게 하더라도 마음은 보다 더 세심하고 넉넉해져 지금의 순간을 웃으면서 받아들였다.
일상의 궤도를 이탈하고 싶어 떠난 여행이었는데, 이 계절과 여행은 서로 닮아있었다. 어쩌면 새 봄을 맞이하기 위한 경계를 여행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계절의 문턱을 여행했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늘 같은 시간에 일어나 운동을 하고 집을 돌보며 하루를 시작한다. 낮잠을 자고 일어나 지난 여행을 기록한 일기와 사진을 정리해서 문장으로 완성하는 작업을 거쳤다. 매일같이 부족한 필력과 에너지의 한계를 느끼지만 처음으로 하고 싶은 것들로 하루를 채우고 있다. 일상의 행복은 별개 아니었다.
문턱의 가장자리에 서있다. 뒤를 돌아보니 표류하던 삶의 궤도는 문턱을 지나 하나의 획을 그었다. 이제 문을 넘어 선을 이어간다. 가본 적 없는 길을 향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우리의 걸음은 새로운 삶의 궤적을 그려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