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번, 달키

다시 찾은 더블린에서 여행을 매듭짓다

by nomadhaus

더블린을 향해 가는 길, 척박한 피트 지대를 벗어나 유채꽃이 핀 노란 들판 사이를 달렸다. 어느 순간부터 교통신호가 조금 바뀐듯한 위화감이 든다. 양보 표지판 용어가 'Yield'에서 'Give way'로 바뀌었다. '길을 내주라니 재밌는 표현이네' 무심한 듯 지나쳤다. 문득 여기가 영국 땅은 아닐까? 지도를 열었다. 그제야 북아일랜드, 영국 땅에 들어왔다는 것을 알아챘다.

아일랜드와 북아일랜드 경계지점, 물결처럼 일렁이는 듯한 형상의 습지대에 있는 작은 성, 내셔널트러스트가 운영하는 크룸에 잠시 들렀다 가기로 했다. 내셔널트러스트는 국립공원, 대저택, 성 등 보존가치가 높은 문화유산, 자연환경을 보존하고 지키기 위해 설립된 재단이다. 시민들의 자발적인 모금, 기부, 증여를 통해 자원을 영구히 소유, 확보하고 관리하고 있다.

푸른 초원이 넓게 펼쳐지고 잔잔히 흐르는 강물과 무너진 성터 그리고 잘 가꿔진 커다란 나무들을 보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학업을 뗀 지 10년이 지났는데 교과서에서만 보던 전형적인 영국식 목가적 풍경(Picturesque)을 이제야 직접 두 눈으로 목격했다.

모처럼 만나는 따수운 햇살과 파릇파릇한 풍경을 보고 나니 이른 봄, 눈 녹은 땅에 새순이 올라온 것처럼 우리 마음도 다시 한번 기운이 돋아났다.


더블린으로 돌아왔다. 편안하게 쉴 겸 더블린 외곽 작은 도시, 영화 원스와 싱스트리트 촬영지였던 달키를 찾았다. 주차 티켓부스에 카드 결제가 안된다. 동전도 다 썼는데. 허둥대던 우리에게 한 노부부가 선물이라며 선뜻 대신 티켓을 끊어주셨다. 끝까지 친절한 아이리쉬 사람들.

정겹고 잘 가꿔진 거리와 두 개의 집이 맞닿은 대칭형 주택들이 인상적이다. 바다는 아직 차갑지만 강인한 켈트족의 후예들에겐 수영을 못 할 이유가 되지 않았다.


귀국에 문제가 생겼다. 수시로 바뀌는 코로나 방역지침을 너무 안이하게 생각했다. 떠나는 전날 밤에야 대한민국 입국 지침이 바뀌어 코로나 완치 유효기간이 만료된 것을 알았다. 현지 PCR 음성 확인서가 없으면 집에 돌아갈 수 없게 돼버렸다. 수만 가지 시나리오를 돌렸다. 나의 결론은 어차피 늦은 거 여행 더 한다 생각하고 다음 비행기표를 알아보자. 지수의 생각은 달랐다. 심장소리가 옆에서도 들렸다. 더블린 시내에 모든 PCR 검사소를 뒤지더니 딱 한 곳, 4시간 이내 신속 PCR 검사소를 찾았다. 다급하게 예약을 진행했지만 지수는 예약성공, 나는 실패했다. 이미 다음 여행을 생각한 나는 될 대로 되라라는 심정으로 푹잤다. 지수는 밤을 설친 것 같다.

귀국 당일 아침, 검사소 문이 열리자마자 다급함을 호소했다. 다행히 오후에 예약된 지수의 검사를 오전으로 앞당겼다. 문제는 나였다. 담당자는 권한 밖이라며 이메일로 본사에 요청해보라 했다. 그 말을 듣고 열심히 키패드를 두드렸고 지수는 기다릴 수 없었다. 우리의 간절함을 다시 한번 호소했다. 담당자는 잠깐 생각하더니 융통성을 발휘했다. 다른 날짜 예약을 하면 지금 검사해 주겠단다. 신이 여기에 있었다. 검사를 마치고 압도적 감사를 올렸다.

4시간을 남겨놓고 음성 확인서를 받았다. 이제야 안심이 된다. 지수의 간절함이 없었다면 성립될 수 없었다.

남은 시간 동안 도시를 걸으며 도시 곳곳을 눈에 담고 되새겼다. 길에는 악사들이 버스킹을 하고 있다. 인파 속에 주목을 끄는 관객이 나타났다. 어긋난 리듬, 의미 없는 몸짓, 알 수 없는 표정... 그의 춤사위는 무엇 하나도 음악과 맞지 않았다. 하지만 그를 조롱할 수 없었다. 그의 감정은 순수히 자신의 것임을 말하고 있다. 주위 사람들도 그가 무얼 하든 상관하지 않는다. 각자의 관심에 집중할 뿐이다. 거대한 땅 위에서 자란 사람들의 너른 마음을 알 것 같았다.

딩글, 클리프던, 미나더프에서 만났던 아일랜드 사람들의 구수한 억양과 유쾌함, 다정했던 모습들이 벌써 그립다. 그리고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커다랗고 커다란 대지는 절대 잊지 못할 거다. 힘겹게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장대했던 여정이 드디어 끝났다. 두 계절의 문턱을 넘는 동안 셀 수 없이 많은 감정과 추억을 새기고 돌아간다. 힘들고 우울했던 기억, 평화롭고 행복했던 기억들을 가득 엮어 마침내 계절문턱 여행을 매듭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