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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일년을 보내는 법

by 최은영

달력의 숫자보다 계절의 감각으로 한 해를 기억하는 편이다.


봄이 오면 꽃의 궤적을 따라 걷는다. 하얀 목련과 분홍빛 벚꽃이 팝콘처럼 터지는 길 위에서, 겨우내 마음에 켜켜이 쌓인 먼지를 털어낸다. 5월의 햇살이 다정한 손길로 어깨를 두드리면 '가정의 달'이라는 명칭이 지닌 온기를 비로소 실감한다. 가족 여행지에서 찍은 사진 속에는 우리 각자의 시간이 나이테처럼 겹겹이 포개져 있다.


여름은 예고 없이 당도하는 손님 같다. 어느 날 문득 창을 열면 습기와 자유의 기척이 동시에 밀려든다. 눈이 시리도록 푸른 날들 속에서 나는 계획보다 감정에 충실해지곤 한다. 해가 길어지는 속도에 맞춰 마음의 보폭도 조금씩 넓어진다. 여름이 지나치게 눈부셔 다가올 겨울의 한기가 겁날 때면, 인생 선배가 건넨 말을 처방전처럼 꺼내 든다.


"괜찮아, 이 열기를 충분히 누려야 겨울의 매서움을 견딜 힘이 생기는 법이야."

그 한마디는 과열된 내 삶의 뚜껑을 열어 김을 빼주는 유일한 통로였다.


그러다 햇살의 각도가 기울고 바람의 결이 달라지면, 내가 가장 아끼는 계절인 가을이 찾아온다. 모든 것이 제 빛깔을 되찾는 시간. 불안도, 미련도 한 겹의 낙엽처럼 가벼워진다.


그리고 다시 겨울, 크리스마스. 거리는 반짝이지만 찬 바람이 불면 마음 한구석이 괜히 시리고 헛헛해진다. 공기가 차가워질수록, 나는 식어가는 마음을 데우고 빈틈을 채워줄 무언가를 더 필사적으로 찾게 된다. 갓 구운 붕어빵을 품에 안았을 때 손끝에 닿는 열기, 하루의 한기를 억지로 떼어내주는 반신욕의 물 온도, 그리고 고마운 이들에게 줄 선물을 고르며 혼자 몽글몽글해지는 마음 같은 것들. 그렇게 듬성듬성하던 가슴이 빈틈없이 들어차고 나면, 그제야 비로소 한 해가 완성되는 기분이 든다.


그렇게 계절의 마디를 몇 번 넘겼는지 모를 사이 한 해는 저물고, 다시 새해가 찾아왔다.


나는 새해를 네 번쯤 맞이한다.


연말의 고요 속에서 새 플래너에 소중한 이들의 생일과 미련 섞인 다짐들을 눌러 적으며 첫 번째 새해를, 자정의 함성과 함께 신정을 맞으며 두 번째 새해를 만난다. 한 달 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떡국 한 그릇에 나이 한 살을 버무려 먹으며 세 번째 새해를 맞이하고, 마침내 꽃샘추위가 봄의 문턱에서 기웃거리는 3월이 되어서야 '최종완성본final최종_진짜 최종. hwp' 같은 마지막 새해를 마주하는 것이다. 이쯤 되면 새해의 결심도 재수와 삼수를 거쳐 비로소 삶의 적재적소에 자리를 잡는다.


얼마 전, '나는 더 이상 무너지지 않는다'는 비장한 문장으로 연재를 마쳤을 때, 나는 정말 내가 강철 같은 존재가 된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다시 무너져 내리는 스스로를 보며, 나는 자신이 '확신에 찬 바보'였음을 깨달았다. 가까운 이들에게조차 보이고 싶지 않은 초라한 몰골로, 심장이 바닥으로 가라앉는 무거운 소리를 홀로 듣고 있었다. "이놈의 무너지고 일어나기는 대체 언제까지 반복되는 뫼비우스의 띠인가" 하는 서러움이 울컥 차올랐다.


그런데 생물학을 전공한 나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우리 몸은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부수고 다시 짓는 신진대사를 반복한다. 이 치열한 파괴와 재건은 ‘항상성’이라는 고매한 목표를 지키기 위한 필사적인 과정이다. 완벽하게 균형 잡힌 상태란 찰나에 불과하며, 살아있는 모든 것은 찰랑거리는 물결처럼 흔들리며 균형을 맞춰가는 법이다.


삶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감정의 무너짐은 실패의 낙인이 아니라, 균형을 회복하려는 마음의 생존 메커니즘이다. 그러니 '더 이상 무너지지 않겠다'는 선언은 세포들에게 '신진대사를 멈추라'라고 명령하는 것만큼이나 오만하고 무의미한 일인 것이다.


이제 나는 무너지는 나를 보며 자책하는 대신, 조금 더 뻔뻔해지기로 했다. 다음번 멘탈이 바스러질 때를 대비해 나만의 '파괴 공정 매뉴얼'이나 만들어야지. 최소한 다음번엔 "인생 망했어"라고 절규하는 대신, 입가에 묻은 과자 부스러기를 털며 이렇게 중얼거릴 수 있도록.


아, 항상성을 되찾는 과정이 시작되었군.


시간의 속도는 점점 가속페달을 밟지만, 나는 조금 더 느리게 걷고 싶다. 까치발을 들고 높은 곳의 열매를 따려 애쓰는 일은 잠시 내려놓으려 한다. 올해 이 첫 한 달이, 그리고 남은 이 한 해가 부디 진정한 의미의 '쉼'으로 남기를, 그리고 나에게 좀 더 다정한 한 해가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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