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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멘토스 Jun 28. 2022

자수성가의 압박

열심히 달리는데 필요한 댓가, 번아웃의 경험

나에게 자수성가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사항 이었다.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부모님의 고생과 희생을 비교적 빠른시기에 깨닫게 됬고

그것을 모른척하며 철부지로 지내기엔 나는 그렇지 못한 성격으로 태어났다.


식당일을 하시며 고생을 많이 하신 어머니는 항상 건강이 좋지 못하셨다.

그래서 병원에 입원한 모습을 볼때면 빨리 성공해서 어머니의 고생을

줄여드리고 싶다고 되내었다.


초등학생때 목표는 좋은 성적이 아닌 300만원을 모으는 것이었다.

어떻게 하면 어머니를 맘편하게 쉬게 해드릴 수 있을까 생각을 하다가

그 당시 한달정도 쉬게 해드리기 위해서는 그정도가 필요하다는

얼핏 어른들께 들어서 책정한 목표였다.


그 이후 어른들이 용돈을 주시면 한푼도 쓰지않고 서랍 깊숙한곳에 있는

저금통에 모아 나갔다. 학교 끝나고 슬러시, 떡볶이 등 먹고싶은게 많았지만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나를 위한 것들을 철저히 배제했다.


그당시 딱지, 미니카, 팽이 등 친구들과 어울릴때 필요했던 장난감들이 많았다.

하지만 그런것에도 옆에서 구경을 할뿐 내것을 갖으려 하지는 않았었다.


그래도 돈이 모일때면 엄마를 쉬게해드릴 수 있는 날이 점점 가까워 오는구나

생각하면서 뿌듯한 마음으로 아쉬움을 달래곤 했다.


그렇게 250만원이 모일때쯤 부모님께 나의 계획에 대해 말씀을 드렸다.

근데 이게 왠걸? 마음은 고맙지만 그래도 쉴수는 없다고 답변하셨다.


지금 생각하면 당연히 아들의 코묻은 돈으로 한달 장사를 쉰다는게

부모로서 부담스럽고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셨을거 같다고 생각되지만

그당시에는 당황스럽기만 했고 내 맘을 몰라주는 부모님이 미웠다.


단 하나를 보고 진짜 열심히 했는데...


그리고 생각한 결론은 이랬다.

"돈이 부족했기 때문이구나 빠르게 자수성가를 해야 부모님이
편하게 쉬실수 있겠구나"


그때부터 무의식속에는 '자수성가=악착같음' 이라는 공식이 생겨났다.


하고싶은 일은 여전히 마음 한켠에 박아두고 해내야 하는일들을 해내고 살아왔다.

오로지 경주마처럼 시야를 좁히고 앞만보고 달렸다.


그렇게 재수를 하지않고 바로 대학교를 갔고 정해진 시기에 군대를 갔으며 영창없이

칼전역을 하고 시기에 맞춰 바로 칼입학을 했다.


지방에 있는 국립대학교에 합격했던 나는 철없는 생각으로 초기 반년을 방황을 했다.

수도권에 살았던지라 서울에 있는 대학교만 바라봤고 그 곳에 가지 않으면 더 좋은 기업을

가지 못할꺼라 생각했었다. 목표에 다다르지 못한 나는 루저라고 생각이 되었다.


그때 나에게 다시한번 열심히 살아보자고 손을 내밀어준 동기형의 도움이 없었다면

아마 방황을 종결하지 못했을것 같다.

그 당시 입학 동기였지만 이미 다른 대학교 태권도 학과를 다니던 4살 터울의 형은

너무도 성숙한 사람이었다. 나처럼 집안 환경은 어려웠고 빚은 산더미 였다.

그런데도 흔들림없이 꼿꼿하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길을 걷고 있었다.


방황의 시기에 형이 내밀어준 손을 잡을듯 말듯 간을 보며 반년을 지냈다.

그저 멀리서 지켜보면서 다시 열심히 살다가 원하는 결과를 이루지 못하면

무너질거 같은 두려움을 느낄때면 형이 뻗은 손을 멀리했다.


그렇다고 제대로 폼나고 멋지게 놀줄도 몰랐던 나는 그저 저녁에 동기들과 술을 마시고

PC방을 가서 밤을세는 일상으로 하루를 가득채웠다.


그렇게 생각없이 지내다 보니 슬슬 내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아닌거 같다. 너답지 안잖아. 열심히 살아야지"


다시한번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2학기 부터는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오래 쉬어서 그런가 일전에 열심히 살았던 텐션이 나오지 않았다.

집중력도 실행력도 떨어지니 부진한 결과에 재미가 없었다.


그래도 나에겐 멘토형이 있었다. 이때 멘토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아마 멘토가 없었다면 아마 다시 텐션을 회복하지 못하고 포기했을거 같다.  


텐션이 회복될 때쯤 다행히 좋은 성적을 받고 군입대를 했다.


복학할때 이미 이뤘던 성공 경험과 20kg 감량이라는 쾌거를 이루면서

자신감이 하늘을 찔렀다. 열기가 불타오르는 경주마 모드로 2학년을 보냈다.


'학교→헬스장→집' 루트로 지내다 보니 혼자있는 시간이 많아졌고 반년을

그 루트로 혼자 지내다 보니 우울증 비슷한 느낌이 왔다. 혼자있는게 너무도

싫었고 무서웠고 눈물이 났다.


밖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가 웃고 있는거 같은데 나는 그저 하숙방 앞에서

공부하는 중간중간 담배피는게 휴식의 전부였다.

휴식의 개념을 몰랐기에 그저 앉아서 공부하는게 내가 해야할 전부라 생각했다.

쉬는날에는 운동을 다녀와서 밥먹고 밤12시까지 과제와 공부를 했다.


그렇게 혼자 골방에 계속 앉아 있다보니 '죽으면 편해질까?'란 생각까지 하게됬다.


그 당시에는 이런걸 편히 속터 놓고 말할곳이 없었다.

다행히 결과는 좋았다. 열심히 한만큼 성과가 나오니 좋았다.

그것이 번아웃과 우울증 같은 어려움에 퀀텀점프로 빠져나올 계기가 됐다.


열심히 하다보니 좋은일이 계속 해서 생기게 되었다.

대기업에서 특별공채로 산학장학생을 선발하는 제도에 합격이 된것이다.

남은 2년 요구되는 스펙과 학점만 맞추면 대기업 입사는 따놓은 당상이었다.


항상 달리는것에 익숙한 나였기에 현실에 안주하는게 세상에서 제일 불안한 상태다.

남은 기간 학점을 놓치지 않았고 자격증 공부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마음의 여유는

있었지만 게으르게 보이는 나 자신은 싫었던거 같다.


산학장학생 제도에는 좋은점이 몇가지 있는데 그때 맘에 들었던게 입사를 1년까지

뒤로 미룰 수 있는거였다. 삶에서 이루고 싶었던 목표인 안정적이고 돈 많이 주는

대기업 입사가 확정됬으니 6개월정도해외 여행을 하며 그동안 사치라고 생각하며

해보지 못했던 경험을 해보고 싶었다.


항상 방학때면 생활비를 벌기위해 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했기때문에 남들 다하는

어학연수나 워킹홀리데이, 자격증 공부는 엄두도 내지 못했었다.


근데 예상하지 못했던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혔다. 그 당시 경기가 좋지않았기 때문에

얼릉 입사해서 계약서 부터 쓰고 차차 여행을 다니는게 어떻겠냐고 말하셨다.


열심히 살았던 나에게 보상을 주고싶었던 계획에 차질이 생기니 반발감이 생겼다.

그리고 열심히 살았던 나의 노력을 아버지는 인정해 주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많은 부분을 희생하며 앞만보고 달려온 나에게 이것 또한 사치였던건가....


내 뜻을 굽힐 수 없었다. 아니 싫었다. 지금 하지 않고 또 입사를 한다면

1학년때 방황했던 나처럼 또 방황의 길을 걸을거라고 생각됬다.

사람이 열심히 달리는데는 대가가 필요하다는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처음으로 아버지의 말을 거부하고 어떤 타협도 없이 회사에

입사 유예를 신청했고 아버지에게 통보했다.

(아버지와 사이가 조금씩 틀어진 시기도 비슷했던거 같다...)


그렇게 나는 반년의 입사유예로 처음으로 계획된 휴식을 해보았다.


에너지가 넘쳐났고 뭐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하늘을 뚫을 기세였다.

열심히 살았으니 앞으로도 잘될 거라는 생각으로 말이다.

근데 여전히 휴식을 어떻게해야 잘취하고 언제 취해야 하는지 배우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그저 넘치는 에너지가 영원할 거라 생각했다.


내몸이 연비가 좋지 못하다는 사실을 모른채로 말이다.


그리고 회사에서 생활을 하면서 나에게 휴식과 보상을 주는법을

미리 배우지 않은것을 끝도 없이 후회했다....


그리고 나의 삼진번아웃을 경험하게된 회사생활이 시작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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