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를 보러 가는 보폭의 이야기
이런 고백을 하면 하루(여자친구 가명)는 분명 쑥스러워하며 고개를 젓겠지만, 저는 지금도 가끔 그날의 공기 농도와 감정들을 떠올립니다. 기숙사 문을 열고 나와 약속 장소인 탑 앞까지 이르는 1,500m의 거리. 평소라면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 그 짧은 길이 그날따라 유독 아득하게 느껴졌습니다.
흔히들 뇌가 강렬한 행복이나 긴장을 마주하면 정보 처리 속도가 비약적으로 빨라져 시간이 느리게 흐른다고 말하곤 합니다. 1초가 1분처럼, 때로는 그보다 더 긴 감정의 조각처럼 늘어지는 기묘한 감각. 학교 교정은 이제 막 벚꽃이 피어날 듯 말 듯 꽃망울을 머금은 채, 온통 싱그러운 연초록빛으로 일렁이고 있었습니다.
길 위에는 저와 하루를 포함한 갓 입학한 새내기들의 웃음소리와 데이트를 앞둔 커플들의 수줍은 속삭임이 가득했습니다. 저는 거창한 정장 대신 편안한 후드티에 티셔츠를 걸쳤고, 조금 불편하더라도 애써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평소 잘 입지 않던 청바지를 꿰어 입고 길을 나섰습니다. 지나가는 차들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참 평화롭구나. 나도 행복해질 수 있을까? 이곳이라면 가능할까?'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훈련에 매진하는 학생들을 지나 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진 숲길로 들어섰을 때, 저는 미래의 어느 날 사랑하는 사람과 이 길을 꼭 나란히 걷고 싶다는 막연한 소망을 품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 소망의 주인공이 바로 하루가 될 줄은 미처 몰랐던 채로 말입니다.
학과 건물을 지나 드디어 약속 장소가 150m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멀리서 조그맣게, 정문을 향해 서 있는 하루의 실루엣이 보였습니다.
그 순간, 시끌벅적하던 캠퍼스의 소음이 단숨에 소거되었습니다. 마치 풍덩, 하고 고요한 물속에 깊이 빠져드는 기분이었습니다.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가 귓가를 울렸고,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려던 이성은 무력하게 무너졌습니다. 평소 저를 집어삼키던 긴장된 각성과 통제들도 그 순간만큼은 자취를 감추었고, 오직 투명한 감정만이 남았습니다.
많은 이들이 말하던 '첫눈에 반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왜 그 찰나에는 숨조차 쉴 수 없는지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그녀에게 다가가는 한 걸음마다, 제 시야 속의 하루는 점차 흐릿한 형태에서 눈이 부시도록 선명한 실체로 변해갔습니다. 제 발걸음이 가까워질수록 제 마음은 이미 그녀와의 미래를 향해 전력 질주를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이를 '김칫국'이라 부를지 모르나, 저에게 그것은 찰나에 설계된 완벽한 일생의 설계도였습니다.
그녀에게 닿기까지 남은 거리 동안, 저는 보폭마다 우리가 함께할 미래의 조각들을 하나씩 지어 올렸습니다. 어느덧 저도 모르게 주어를 '우리'라고 고쳐 쓰고 있었습니다.
첫 번째 걸음 - 저는 시골의 조그마한 땅에 우리만의 집을 짓고 싶었습니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건축박람회를 다니고 디자인 책과 스케치를 탐독하며 구체화해 온 꿈이었습니다. 볕이 잘 드는 한적한 곳, 사계절의 변화를 온전히 담아낼 넓은 창과 빗소리·눈소리가 머리 위로 떨어지는 통유리 천장. 따뜻한 나무 향이 나는 가구들 사이로 평화롭게 웃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두 번째 걸음 - 제가 설계한 그 집 안에서 피어오르는 생생한 온기를 상상했습니다. 식탁 앞에 마주 앉아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을 먹으며 하루의 일과를 공유하는 소박한 저녁 풍경. 그 상상만으로도 정말 즐겁고 설렜습니다.
세 번째 걸음 - 하루와 저를 닮은 아이들이 마당을 뛰어놀고, 그 웃음소리가 집안 가득 울려 퍼지는 상상을 했습니다. 한 생명을 함께 책임지고 키워내는 숭고한 고통과 기쁨이 보폭 사이에 스몄습니다. '적어도 나처럼 힘들고, 아프게 키우지는 않으리라'는 다짐도 함께였습니다.
네 번째 걸음 -제 지병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오랜 시간을 함께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같이 늙어가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았습니다. 젊은 날의 치열함을 뒤로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유일한 안식처가 되어주는 노년의 평화가 그 발걸음에 담겼습니다.
마침내 그녀의 앞에 멈춰 섰습니다. 1,500m를 걸어왔지만, 제 영혼은 이미 그녀와 함께 수십 년의 생을 살고 돌아온 듯한 포만감을 느꼈습니다.
조그맣게 서 있던 그녀가 고개를 돌려 저를 바라보았습니다. 가까이서 본 그녀의 눈동자 속에는 제가 방금 설계한 그 모든 미래가 이미 담겨 있는 듯했습니다. 저는 떨리는 숨을 몰아쉬며, 제 생애를 통틀어 가장 긴 여행의 마침표이자 새로운 시작의 서막이 될 한마디를 건넸습니다.
"안녕."
그 짧은 인사는 사실 150m 전부터 차곡차곡 쌓아 올린 거대한 일생의 고백이 압축된 결정체였습니다. 평소 미래를 시뮬레이션하던 저의 모든 감각이 오직 이 순간을 위해 최적화되어 있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캠퍼스의 연초록빛은 더욱 짙어졌고, 저의 찬란한 꿈은 그렇게 눈앞의 현실이 되어 저를 향해 미소 지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