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률

데이터가 없는 길 위에서 피어나는 숭고한 오류

by 감자돌이

시뮬레이션 우주의 하드웨어, 비결정론과 확률


하루(여자친구 가명)는 종종 이 세상이 고도로 설계된 시뮬레이션이라는 일론 머스크의 가설에 깊이 공감하곤 합니다. 만약 이 우주가 거대한 연산 장치라면, 그 세계를 움직이는 가장 근본적인 운영 체제는 단연 '확률'일 것입니다.
현대 물리학의 정수인 양자역학은 우주가 근본적으로 결정론적이지 않음을 시사합니다. 입자의 상태는 관측 전까지 여러 가능성이 중첩된 확률의 구름으로 존재합니다. 이는 우주의 미래가 단 한 줄의 시나리오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 매 순간 주사위가 던져지는 거대한 확률 게임판 위에 놓여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 게임판의 크기는 아마 인간의 상상을 초월할 만큼 광활할 것입니다. 즉, 확률은 우리가 무지해서 생기는 정보의 공백이 아니라, 이 시뮬레이션을 지탱하는 하드웨어 그 자체인 셈입니다.


우리는 왜 1%의 불행에 떠는가


우리의 본능과 판단은 이 확률적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진화해 왔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뇌는 통계학적으로 공정한 계산기가 아닙니다. 진화심리학적으로 인류는 '부정적 편향'을 가진 개체만이 생존했습니다. 우리의 뇌는 생존을 위해 '부정'이라는 항목에 본능적인 가산점을 부여합니다.
수풀 너머의 바스락 거림을 '바람'일 확률 99%보다 '맹수'일 확률 1%에 집중해 도망쳤던 겁쟁이 혹은 의심 많은 선조들이 우리의 조상입니다. 심리학자 다니엘 카너먼의 전망 이론이 증명하듯, 우리는 얻는 기쁨보다 잃는 고통을 약 2배 더 크게 느끼는 '손실 회피' 성향을 타고났습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쓰는 "확실해?", "얼마나(안전해)?" 같은 질문들은 사실 90%의 성공 확률보다 10%의 실패 가능성이 주는 공포를 잠재우려는 뇌의 처절한 방어 기제입니다.


0.001%의 삶이 평범해 보이는 거울의 방


그런데 현대 사회는 이 오래된 뇌에 또 다른 차원의 확률 왜곡을 주입합니다. 바로 인스타그램과 같은 SNS입니다. 우리의 뇌가 1%의 불행을 과대평가하도록 진화했다면, SNS 알고리즘은 상위 0.001%의 극도로 희박한 행운만을 선별하여 마치 그것이 '평균적인 삶'인 양 전시합니다.
타임라인에 쏟아지는 화려한 성공들은 통계적으로 '극단값, 이상치'에 해당하지만, SNS라는 거울의 방에서는 그것이 일상의 표준으로 둔갑합니다. 인스타그램이라는 특수한 표본 집단 안에서 그들의 삶은 '전부'이기 때문에 이 왜곡은 더욱 강력한 설득력을 얻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지극히 정상적인, 때로는 지루하고 실수투성인 '평균 확률의 삶'을 타인의 편집된 하이라이트와 비교하며 깊은 박탈감에 빠집니다. 이는 시뮬레이션 속에서 만들어진 거대한 환각이자, 확률에 대한 가장 폭력적인 왜곡입니다.


'설마'와 '혹시나' 사이의 선택적 믿음


우리는 화려한 결괏값에 현혹되어 확률의 전제를 잊곤 합니다. 바로 확률에는 늘 전제가 따른다는 베이즈 정리의 원칙입니다. SNS는 결과에 도달하기까지의 복잡한 조건(사전 확률)들을 앵글 밖으로 치워버립니다. 그들의 배경, 숨겨진 실패, 연출된 노력은 보이지 않습니다.
재미있는 점은 인간의 '선택적 믿음'입니다. 우리는 특히 위험, 나아가 전반적인 삶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통계를 의지하며 '부정적인 설마(설마 나한테 그런 불운이?)'를 경계하지만, 동시에 극소수의 성공 확률 앞에서는 '긍정적인 혹시나(혹시나 나도 저렇게?)'에 마음을 빼앗깁니다. 우리는 SNS의 화려함이 가공된 것임을 머리로는 알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뇌는 통계적 수치를 선택적으로 믿으며, 타인의 0.001%가 나의 조건 위에서도 재현될 것이라는 위험한 착각을 붙잡습니다.


유전적 설계와 윤리의 임계점


확률을 통제하려는 욕망은 이제 생명의 영역으로까지 확장됩니다. 우성 정자 선별이나 착상 전 유전자 진단(PGT) 기술은 인류가 확률의 설계자가 되려는 가장 매혹적인 시도입니다. 하지만 다양성이 사라진 시스템은 작은 변수에도 쉽게 붕괴한다는 복잡계 이론을 떠올릴 때, 저는 이 기술 앞에서 주저하게 됩니다.
모든 생명은 그 자체로 소중하며 각자의 의미가 있습니다. 확률을 완벽히 통제하려는 순간, 우리는 생명의 경이로운 불예측성을 잃고 고정된 프로그램의 부품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습니다. 인위적인 100%의 완벽함보다, 조금 서툴더라도 스스로의 의지가 개입된 51%의 선택이 더 인간답게 느껴지는 이유입니다.


확률의 파도를 넘어서는 법


우리는 진화가 심어준 부정적 편향과 SNS가 조장한 환상 사이에서 표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믿습니다. 확률은 우리가 발 디딘 현실의 지도일 뿐, 나아갈 방향을 결정하는 나침반은 아닙니다. 지도는 이미 가본 길의 높낮이를 보여주지만, 결국 어디로 향할지 결정하는 것은 여행자의 의지입니다. 삶은 선택의 연속성입니다.
시뮬레이션 세상의 알고리즘이 내놓은 낮은 성공 확률에도 불구하고, 많은 분들이 오늘 하루를 충실히 살아내고 사랑하는 이의 손을 잡는 행위는 그 자체로 확률을 배반하는 고귀한 오류입니다. 확률의 숫자가 0을 가리킬지라도, 저희들의 삶의 가능성은 여전히 열려 있습니다.


데이터 없는 길의 숭고함


우리는 왜 확률적으로 불가능에 가까운 영역을 이뤄낸 이들에게 열광할까요? 그것은 그들이 시뮬레이션의 알고리즘을 깨뜨린 '데이터 없는 길'의 개척자이기 때문입니다.
통계적으로 성공 확률이 0%에 수렴하는 길, 그 누구도 걸어가 본 적 없어 참고할 만한 기록조차 존재하지 않는 길을 걷는다는 것은 공포 그 자체입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데이터가 없는 암흑 속에서 극심한 두려움을 느끼도록 설계되었습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그 무서움을 무릅쓰고 한 걸음을 내딛습니다. 그들은 숫자로 계산되는 안정적인 삶을 거부하고, 예측 불가능성이라는 거대한 파도 속으로 자신을 던집니다. 불가능성은 꽤나 흥미로운 곳입니다.
우리가 그들에게 찬사를 보내는 이유는, 그들이 '확률의 노예'로 살아가던 우리에게 인간의 의지가 통계보다 강할 수 있음을 증명해 주기 때문입니다. 데이터가 없는 곳에서 길을 만드는 행위는 시뮬레이션의 경계를 확장하는 일입니다. 모두가 '안전한 확률'이라는 감옥 속에 갇혀 있을 때, 0%의 가능성을 뚫고 나아가는 영웅들의 서사는 우리 가슴속의 '혹시나'를 '확신'으로 바꿔놓습니다.
결국 인간이 가장 아름다워지는 순간은 계산기를 두드리는 순간이 아니라, 확률도 데이터도 없는 막막한 어둠 속에서 오직 자신의 심장 소리만을 믿고 나아가는 순간일 것입니다. 저 또한 저만의 '데이터 없는 길' 위에서, 비록 두렵지만 기꺼이 주사위를 던지는 개척자가 되고자 합니다.

그게 재밌고 살아있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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