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 <-> 새벽
피곤하다는 감각이 전신을 육중하게 짓누릅니다. 머리맡에서 울리는 알람 소리는 정적을 찢고 일어나라 외치는 준엄한 명령과 같습니다. 5시 정각, 5분, 10분으로 촘촘하게 맞춰놓았던 알람들을 결국 한 시간 뒤로 미뤄보기도 합니다. 본래 이 시간은 저의 러닝 및 몸을 푸는 시간입니다. 가볍게 바나나 하나와 구운 달걀 2개로 최소한의 에너지를 채우고, 푸시업으로 잠든 근육을 깨운 뒤 헬스장으로 향해야 합니다.
결국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서면, 서울의 거리는 평소와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영화 <콰이어트 플레이스>의 장면처럼, 비현실적인 고요가 도시를 점거하고 있습니다. 아침 7시부터 새벽 2시까지 쉼 없이 소음을 뱉어내던 서울이지만, 새벽 5시와 6시 사이의 이 공간만큼은 오직 깨어난 자들에게만 허락된 성소와 같습니다.
그 적막을 밟으며 걷다 보면, 이 시간에만 마주칠 수 있는 '동지'들을 발견합니다. 차가운 새벽 공기를 가르며 거리를 정화하는 환경미화원분들, 누군가의 아침을 실어 나르는 라이더와 택배 기사님들, 그리고 잠이 줄어든 노인들. 이들은 도시가 깊은 잠에 빠진 사이, 각자의 생존과 삶을 묵묵히 증명해 내는 분들입니다.
새벽 4시 30분, 혹은 5시의 헬스장은 기이한 에너지가 진동하는 곳입니다. 많아야 서너 명뿐인 그 공간에서 제가 체득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이 시간에 깨어 있는 사람은 좋은 의미든, 혹은 다소 위험한 의미든 '제정신은 아니다'라는 점입니다. 지독한 자기 관리와 통제에 사로잡힌 강박증 환자이거나, 초월적인 신체와 정신을 소유한 자, 혹은 불안에 잠식되어 밤을 지새운 이들뿐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초등학생 때부터 아침에 운동하는 이들을 '모닝 멤버'라 불렀습니다. 매일 같은 시간, 같은 기구 앞에 서다 보면 굳이 대화하지 않아도 묘한 유대감이 형성됩니다. 하지만 이 무언의 멤버십에 가입하기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월요일 새벽에는 의욕에 찬 새로운 얼굴들이 보이지만, 화요일이나 수요일이 되면 그들은 신기루처럼 사라집니다. 결국 '제정신'이 아닌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자들만이 이곳에 남습니다. 가끔 보이던 이가 보이지 않으면 내심 안부를 궁금해하고, 다시 나타나면 반가움을 느끼는 것은 이 고독한 새벽에만 느낄 수 있는 동료애입니다.
잠을 이겨내는 일은 생리적 본능을 거스르는 고통입니다. 새벽 1시에 잠들어 5시에 일어나는 삶은 필연적으로 수면 부족을 동반합니다. 6시에 일어난다 해도 절대적인 수면량은 턱없이 부족합니다. 특히 저는 뇌전증이라는 불청객이 수면 부채와 얼마나 치명적인 관계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뇌의 전기적 신호가 안정을 찾아야 할 시간에 억지로 깨어 있는 행위는, 어쩌면 저 자신을 벼랑 끝으로 밀어 넣는 위험한 도박일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저는 일어납니다.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살기에 뇌전증이라는 제약에 연연하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세상이 권장하는 8~10시간의 수면을 모두 지켜낸다면, 평온은 얻을지언정 제가 원하는 자기 계발과 목표는 단 하나도 이룰 수 없을 것입니다. 세상은 모순적입니다.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서는 평온을 담보로 투쟁해야만 합니다. 저는 안락한 평온 대신 치열한 투쟁을 선택하기로 했습니다.
매일 밤, 하루(여자친구 가명)를 포옹할 때면 그녀는 가끔 제 몸에서 '전류가 흐르는 기분'이 든다고 말합니다. 그녀의 예민한 촉은 제 몸이 보내는 적신호를 저보다 먼저 감각합니다. "오늘은 좀 쉬는 게 어때?"라는 그녀의 권유는 단순한 걱정을 넘어선 생존을 위한 경고임을 압니다. 하지만 저는 다음 날 새벽에도 어김없이 눈을 뜹니다.
일어나기 싫은 마음은 본능에 가깝습니다. 알람이 울리는 찰나, 뇌 속에서는 수만 가지의 자기 합리화가 작동합니다. "오늘만 쉬자", "10분만 더 자면 컨디션이 좋아질 거야", "휴식도 훈련의 일부다." 저는 이 목소리들을 믿지 않습니다. 그것은 뇌가 저를 안주시키기 위해 건네는 달콤한 독약일 뿐입니다. 한 번 그 유혹에 굴복하는 순간, 제가 쌓아온 통제의 탑은 단번에 무너질 것입니다. 새벽 5시에 눈을 뜨자마자 '퍽' 하고 몸을 던지듯 일어나야 하는 이유입니다. 생각할 틈을 주면 몸은 이미 이불속으로 도망쳐 버리기 때문입니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무언가를 버려야 합니다. 잠이라는 달콤한 안식을 포기한 대가는 혹독하지만, 그 끝에서 얻는 성취감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습니다. 남들이 잠든 사이 저만의 시스템을 가동했다는 뿌듯함, 도시의 소음이 시작되기 전 차가운 새벽 공기 속에서 하늘을 마주했다는 고요한 행복은 제 하루를 지탱하는 가장 단단한 정신적 근육이 됩니다.
다만, 이 치열함의 본질은 '자학'이 아닌 '진화'에 있어야 함을 잊지 않으려 합니다. 잠을 줄이는 목적은 더 강한 저를 만들기 위함이지, 저를 파괴하기 위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글을 읽는 분들도 한 번쯤 이른 새벽의 기상과 산책을 경험해 보시길 권합니다. 늘 보던 서울의 풍경 속에서 보지 못했던 질서를 발견하게 될 것이며, 저처럼 시골에서 상경하신 분들이라면 새벽 공기 속에 섞인 고향의 향기를 문득 마주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