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꼬두람이 Apr 14. 2023

이야기 끓이는 주전자




커다란 주전자를 상상하면서 강변을 따라 걸었다. 울산에 오래 살았으나 태화강 하류 쪽은 처음이었다. 그 옛날 태화강, 그 옛날 나의 형제들, 그 옛날 나의 애인 자취방, 그 옛날 현대자동차, 그 옛날 학성공원, 그 옛날 파랑포장마차,  그 옛날 어린 가로수들이 수면 위로 쫙 펼쳐졌다. 어디서 왔을까. 물닭 두 마리가 나타나 내가 그린 물그림을 두 갈래로 쭈악 찢었다.

찢어진 그림 끝이 오늘 저녁 약속 시간을 알려줬다. 나는 뒤뚱거리며 강변을 벗어났다. 물에서 나와서 모래 위를 걷는 늙은 물닭처럼. 누구랑 책을 읽고 누구랑 함박스테이크를 먹고 누구랑 수제맥주를 마실 생각을 하니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언덕을 지나 돌계단을 지나 신호등을 지나 남구청을 지나 골목이 지나오는데 이야기 끓이는 주전자가 손을 흔들었다.

멋지고 아름다운 두 분께서 플래카드를 걸고 있었다. 또 몇 분, 또 몇 분, 또 몇 분이 들어오고, 주전자 속에는 마스크 벗은 입들이 와글거렸다. 반가워라, 건강해졌다, 축하한다,라는 말이 오갔다. 온갖 나무들의 함성이 주전자 입구를 휘어잡다가 우르르 미끄러지는 것 같았다. 주전자 뚜껑이 들썩거리도록 웃다가 아픈 기억에서는 웃음이 뚝, 한숨소리도 들렸다.

보글보글... 와글와글... 창밖 어둠이 입꼬리를 올렸다. 이젠 쓸데없음은 뚝! 부정을 자리잡지 못하게 했다. 다행히 오늘은 화사한 과녁이 많은 날, 커다란 주전자 속 거품은 모던하면서 아늑했다. 내가 좋아한 초봄을 닮았다.

이야기 끓이는 주전자(북카페)
매거진의 이전글 소속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