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로그
인생이 행복하고 평화롭고 그럴 때.
그냥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오늘이 며칠이었더라, 생각해야 할 때.
너무나도 단조로운 시기에는
글을 쓸 생각이 잘 들지 않는다.
예상치 못하게 안 좋은 일이 닥치면 메모장을 킨다.
그러니까 결혼식을 앞두고 다래끼가 난다던가,
휴양지로 해외여행을 왔는데 생리가 터진다거나
그런 일보다 더더욱 심각한 일 말이다.
(물론 나는 결혼도 하지 않았고 휴양지로 여행을 가본 적은 없다.)
어쨌거나 그 당시에는
“세상에서 가장 힘든 사람은 나야. “ 라며
온갖 비관적인 생각을 하게 되는
그런 일들이 일어났을 때, 자꾸만 뭘 적고 싶다.
웃기지만 그 일들은 주로 ‘이별’에서 비롯된다.
사람한테 빠지는 시간은
단 몇 초로도 결정된다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다.
상대에게 정 떨어지는 포인트가 있는지,
얼마나 있는 지를 관찰한 뒤
생각보다 많이 없을 때 내 마음에 들였다.
(몇 번 없지만) 여태껏 성공해 본 적 없는
짝사랑을 겪고 난 후로부터는
누군가를 먼저 좋아하는 일은 없었고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
나에게 관심 가져주는 사람 중에서
가장 나은 선택지를 골랐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결혼적령기의 나이로서
주변에서 결혼 소식을 묻기 시작하면서
결혼에 관한 관심이 조금 생겼다.
누군가 "쟤가 너 좋아한대" 하면
그 사람에게 눈길이 가는 것처럼,
나도 결혼의 길을 걸어볼까? 하는 마음이
조금 생긴 거다.
약 3년의 연애를 끝내고 느꼈던 감정은
'결혼 쉽지 않다.'
잘 맞았던 아니던 3년을 함께 했다면
앞으로 30년쯤은 함께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 법도 한데
놀랍게도 이런 기대감이 없었다.
이유는 생략.
그런데 고작, 겨우, 에게? 3주 만난 연인에게
그런 감정을 느껴버렸다.
속물 같지만 (인정한다) 외모도, 능력도, 성격도. 그래. 찾았다 내 사랑!
걸리고 거슬리고 신경 쓰이는 부분이 없었다면
거짓말이고 그냥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초? 아니 며칠 만에 내 마음에 그를 들인 것이다.
웰컴!
나도 놀랐다. 이 짧은 시간에? 내 마음을 다 준다고?
내가 이토록 쉬웠던가.
최근 개봉한 박찬욱 감독의 '어쩔수가없다.'
이 영화처럼 그냥 어쩔수가없었다.
왜냐? 좋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으니까.
(참고로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어쩔수가없다’와 같은 말이라고 생각한다.)
밥, 카페, 술, 영화, 그런 소소한 데이트를
2~3일에 한번 꼴로 하고
매일매일 연락을 이어오면서 느낀 건
좋은 감정보다는 불안한 마음이었다.
이렇게 완벽한 사람이 왜 나를 좋아하지?
이미 나는 심리적으로 을이 된 거다.
어울리지 않는 양말을 신은 걸 봤을 때,
누가 봐도 허세라고 느껴질 자랑을 했을 때,
갑작스럽게 약속을 취소했을 때,
그리고 연락도 잘 되지 않았을 때.
그래도 이 남자가 내가 만날 수 있는 남자 중
가장 갑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분명 거를 타선이었겠지만
내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그를 파랑새나 피앙세라고 생각했는지
그냥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을마나 으리석은지.
나를 숨겨가며 그토록 노력했는데,
올해의 노력상 시상식이 있다면
마지막 후보에 오를 정도로 노력했는데!
예상치 못하게 이별을 통보받았다.
사유는 가치관의 차이? 사실 아직도 잘 모르겠다.
기대치가 높아서 실망이 컸던 건지
나보다 결혼이 급한 나이이기에
한번 씹어보고 아니다 싶으니 퉤 뱉어버린 건지.
(실제로 그는 새로운 음식에 잘 도전하지 않았다.)
이때만큼은 올해의 노력상 후보가 아니라
수상자가 될 만큼 열심히 붙잡았다.
역시 쉽게 잡히지 않았다.
어렵게 잡혔다는 말이 아니라 잡히지 않은 거다.
너와 헤어지지만 않는다면
난 앞으로 너가 시키는 거 뭐든지 할 수 있어.
너 없이 난 못 살아.
물론 이런 말과 행동은 하지 않았다.
나도 사회적 지위와 체면이 있으니. (사실 없다.)
붙잡는다는 건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한다는 것.
이렇게 잡아서 사귄다면
그 후의 관계형성이 어려울 것 같았다.
그 후가 없는데 나는 뭘 또 재고 따진 건지.
그래서 간절해 보이지 않은 걸까.
마음이 아프다, 흔들리기 싫다의 말로
희망고문을 한 그는 열심히 붙잡는 내 연락을
결국 읽씹으로 마무리했다.
읽고 씹기, 씹고 뱉기, 이런 씹...
짧은 만남의 이별이지만,
이별은 길 거 같은 예감이 들었다.
일단 여느 이별인들이 그렇듯,
가장 먼저 세상과의 단절을 시도했다.
그리고는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생각공장을 가동했다.
연휴인데도 내 뇌는 쉬지 못하는 당직 근무자가 된 것이다.
나에게 말했다.
타오르는 불에 내가 물을 끼얹은 거라고.
나도 말했다.
원래 마른 장작은 불이 확 타오를 수 있어서
약간의 물을 부어 천천히 타게끔 한다고.
이 일을 계기로 우리 마음이
더 천천히 탈 수 있지 않겠냐고.
나에 대한 마음이 완전히 전소된 게 아니지 않냐며.
다시 생각해도 내 입에서 나온 말 중
가장 멋진 말 같기는 한데 그래서였을까.
그 말에 대한 대답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어쩔수가없이 노트북을 켰다.
메모장이란 그릇에 담기엔 너무 작아서.
허탈, 허무, 현타, 후회 이런 나중에 생각하면
ㅎ 웃음 나올 과정들을 살짝 맛보고는-
영차! 힘을 내 앉은 거다.
이러다 설 거고, 언제 누워있었냐는 듯 뛰겠지.
뭐 또 다른 누군가에게 마음이 뛸 수도 있는 거고.
그렇지만 아직은 어쩔수가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어쩔수가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