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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땅콩 Feb 20. 2020

굿 리스너를 포기하다

입을 꾹 닫게 만드는 사람들

타인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은 때로는 엄청난 감정 노동을 수반한다. 말을 아껴야 하는 상황이 오거나 수다스러운 지인과 대화를 하다 보니 나는 자연스레 굿 리스너가 되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더 이상은 몇몇 사람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입을 꾹 닫게 만드는 사람의 세 가지 대화 습관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기적의 삼단 논법의 소유자이다.


A: 나 요새 몸이 너무 안 좋아. (문제 상황 공유)

B: 그럼 병원 가 봐. 요새는 한의원도 꽤 좋대.

    내 지인이 너랑 비슷한 증상 있어서 병원 다녔는데 꽤 호전됐어. 그 병원 소개해 줄까? (해결책 제시)

A: 아니야, 난 가도 소용없을 듯. (해결책 거부. 문제 해결 의지 없음)


기적의 삼단 논법을 가진 사람과 대화를 하다 보면 '그래서 뭐 어쩌라고?'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그들은 문제 상황을 공유만 할 뿐 개선 의지가 전혀 없다. 물론 타인의 어려움을 들을 때 꼭 해결책을 제시할 필요는 없다. 누구나 본인이 직접 겪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고, 해결하기 힘든 것들이 세상에는 너무 많기 때문이다. 너무나도 쉽게 상대방의 문제에 해결책을 말하는 것도 실례가 될 수 있다. 그럴 경우에는 '공감'이라는 차선책을 택하고는 했다. 하지만 기적의 삼단 논법의 소유자들은 이마저도 거부한다. 이를 테면 이런 식이다.


A: 나 요새 시댁이랑 너무 사이가 안 좋아. 이번 명절에 안 갈까 봐. (문제 상황 공유)

B: 난 결혼해서 잘 모르겠지만 시댁은 다들 어렵다더라. (공감)

A: 그래도 명절에 가긴 가야지. (답은 정해져 있다)


이런 패턴이 반복되다 보면 듣는 사람은 지친다. 보통 이 부류의 사람은 같은 문제를 계속해서 반복해 말하는 고질병도 갖고 있다. 본인이 이 부류에 속한다면 같은 고민을 계속해서 말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봤으면 좋겠다. 더불어 해결 의지가 없는 문제를 말하는 건 시간 낭비다. 문제 상황을 껴안고 살기로 결정했다면 담담하게 살아가면 된다. "얘기는 내가 할게. 맞장구는 네가 칠래?" 이런 식의 대화는 몹시 피곤하다. 




둘째, 타인의 감정에 공감하지 않고 자신의 입장에서만 생각한다.


A: 내 동생 이번에 결혼해.

B: 야, 그럼 나 이제 남편이랑 싸우면 너네 집 가서 자야겠다ㅋㅋㅋㅋ


놀랍게도 지인과 나눈 실제 대화였다. 보통의 경우는 동생과 함께 오래 살았는데 서운하겠다, 축하한다고 전해 달라는 말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타인에게 공감할 줄 모르는 사람은 모든 상황과 자신의 문제를 직결시킨다. 그 친구가 축하한다,라고 한 마디만 말해줘도 덜 서운했을 텐데. 다소 황당한 대화에 나는 뜨악했다.


여러 무리가 모이는 그룹에서 이런 사람을 만난다면 나는 가급적 그와의 일대일 만남은 피하는 편이다. 무슨 얘기를 해도 본인의 상황에 대입해서 말하니 재미가 없다. 모든 대화가 그의 이야기로 종결되니 대화가 핑퐁이 아니라 스쿼시처럼 느껴진다. 오랫동안 만난 지인이 이 부류에 속할 경우에는 그와 대화하다 보면 오히려 내게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생각마저 든다. 


이 부류의 사람들은 얕게 만나면 나쁘지 않다. 왜냐면 의외의 대답을 종종 하기 때문에 4차원으로 보이기도 하고, 나이에 맞지 않게 귀여워 보일 때도 있다. 하지만 매번 내 얘기에 본인의 상황을 대입해서 응답하면 듣는 이는 속 깊은 이야기를 기대할 수 없다. 




셋째, 모든 이야기를 부정적으로 말한다.


A:  너는 차 살 계획 없어?

B:  차는 무슨. 차 살 돈이 어딨냐? 너처럼 여유 있는 사람이 사는 거지.


직장 동료 여러 명과 모여 술을 마시는 자리였다. 누군가가 차를 살 계획 없느냐 물었고 거기에 되돌아온 대답은 위와 같았다. 여유가 없어서 차를 살 계획이 없다고만 말했으면 그러려니 했을 것이다. 그런데 대뜸 고교시절 본인의 집안이 부도가 나서 어려웠고 자기는 아르바이트하느라 운전면허 딸 생각도 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는 습관적으로 본인이 해내지 못한 일들을 말할 때 어려웠던 지난 시절 이야기를 덧붙였다. 그래도 그가 서른이 넘었으니 십 수년 전의 일이고,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막역한 사이였던 것도 아니다.


또 B는 다른 이가 누리는 것들에 대해 쉽게 폄하겠다. 너는 집이 잘 살아서 그런 거지, 너는 운이 좋다, 대게 이런 식이였다. 아마도 어려웠던 가정환경에 대한 열등감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내 주변에는 가정환경이 어려웠던 친구들 중에 B와 같은 사람은 없었다.


이유가 무엇이든 모든 이야기에 부정적으로 이야기하는 사람을 흔히들 에너지 뱀파이어라고 한다. 감정은 주변인에게 쉽게 전념되고, 특히 부정적인 감정은 더욱 빨리 옮겨간다. 나 역시 이전에는 부정적인 말을 자주 하고는 했었다. 그런데 부정적인 말만 늘 하는 사람을 보고 나니 내 모습을 객관화해서 볼 수 있었다. 아, 저러면 안 되겠구나. 뒤늦은 깨달음이었다.



위의 세 사람은 제 인생에서 비켜주세요. 



매번 위의 세 가지 패턴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나는 더 이상 만나지 않거나, 만남을 줄였다. 나쁜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에 인연을 끊어내기는 아쉬웠다. 그러나 만남 후에 매번 느끼는 찝찝함과 유쾌하지 못한 기분은 다음 약속을 미루게 만들었다. 


그래도 대회 습관은 계속 노력하다 보면 조금은 고쳐지지 않을까. 하지만 타인에게 내 생각을 강요할 순 없기에 그저 만남을 줄일 뿐이다. 또 나와 코드가 잘 맞는 이는 다른 곳에 숨어있을 수도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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