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도 꿈이 있어요
복숭아 화과자
잘 익은 복숭아처럼 발그레 물든 화과자
한입 베어 물면 달큼한 향이 감도는데
식감은 젤리처럼 탱글 하다
입 안도 몽글
마음도 몽글해지는
이야기 시작해 봐야지
엄마가 내게 귀여운 제안을 한 건, 초여름인가 착각할 정도로 바람 한점 없게 쏟아져 붓는 햇살이 가득한 어느 목요일이었다.
우리는 일본식 가옥으로 만들어진 고즈넉한 카페에서 이야기를 나눴다
엄만 제법 쌉쌀해 보이는 말차 한 모금을 마시고서는,
“엄마가 요즘 SNS활동 해보고 싶어
블로그 책을 미리 읽었는데 무슨 말인지 어렵고
힘드네”
엄마가 온라인 활동을 제법 어려워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열정이 있었다는 건 오늘 알았다.
“엄만 블로그에 무얼 담고 싶어요?”
그냥 이것저것 올려도 되지만, 그렇게 도와드리고 싶지는 않았다. 엄마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즐기면서 오래오래 담았으면 했기 때문이다.
엄만 이번엔 쫀득 말랑해 보이는 화과자를 한입 베어 물고선 고민에 빠진 듯했다.
“음.. 엄마하고 있는 원예에 대해서 담고 싶어”
엄마의 목소리가 발그레 물든 화과자처럼 소녀스러워졌다.
“아! 엄마의 꿈 그거?
엄마가 언제부터 원예에 진심이었더라?”
엄마와 나는 크게 아팠던 적이 있었다. 서로 다른 시기였지만 꽤나 오랫동안 고생을 했고, 그로 인해 각자의 고민도 제법 컸다. 그런데 지금은 온전해진 상태로 서로의 꿈을 응원하고 있었다.
“엄만 결혼하고 나서 줄곧 돈 벌기 위해서 직장 다니고 그랬거든
감성이 없는 상태로 살았지
진짜 애기 때 빼고는 감성?
그런 거 진짜 없었어.
현실적인 사람이었어
그런데 50세가 되면서 몸이 탁 아프고 나니까
이제 무얼 해야 하나 싶고
그때 식물 자연이면 뭐라도 배워봐야겠다 하면서
그냥 시작했어
아- 그런데 내가 진짜 딱딱한 사람이더라 정말
사람들이랑 자유롭게 대화하는 것도 진짜 어색했어
처음엔 부끄러웠던 게 원예 배우러 온 사람들이 다들 그렇게 순수하더라니까...
난 계산적이고 늘 시간에 쫓겨 살았는데 말이지.
책은 뭐 잘 안 읽으니까
그제야 알겠더라, 엄마가 얼마나 나와 마주하는 시간이 부족한 사람이었는지를.
내 몸도 제대로 챙겨본 적도 없단 것도 알겠고
이건 뭐 헛살았나 싶고..”
장녀였던 나는 숱하게 들은 엄마 얘기지만, 오늘만큼은 다르게 들렸다. 그렇게 복숭아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물었다.
“아프고 나서 그게 기점이 된 거죠? 그렇죠?
원예가 어쩌면 일에선 첫사랑인가.. 헤헤”
첫사랑이라는 말을 듣자, 엄마의 눈이 반짝거렸다.
“오? 그런 거 같은데?
또 난 성격이 급하잖니
뭔가 나이도 있고 그러니까, 빨리 배우고 효과 봐야지 하는 생각도 솔직히 있었다?
또 한편으론
에이 숲해설가 언제 배워서 나 돈 버나...
에이 꽃도 언제 배워서 저렇게 유능한 사람들과 같이 있어보나...
조급증이 또 생겼어
원예를 진정으로 배우는데 5년 이상은 해야 할 거 같더라고”
나 역시도 공감이 갔다. 갑자기 건강이 나빠져 앞날이 막막했던 기억이 떠올랐으니까.
“하긴 기억나요.. 엄마 당시 무슨 교재라면서 두꺼운 책 한 권 들고 왔는데
야생에서 곰이 으어- 하고 위화감 들게 있길래
설마.. 엄마 숲 속 탐방 저 정도로 해야 하는 걸까? 싶었어요
그러면 그때 어떻게 마음을 다독였어요?”
엄만 화려한 미인은 아니지만, 아름답게 이목구비가 조화되는 편안하고 단아한 매력을 지녔다. 그와 반전되는 수다쟁이 텐션이 서서히 가동되었다.
“익숙해지던걸
느림이?”
시계토끼 같은 엄마와 거리가 먼 단어였다.
“혹시 느림의 미학?”
좋은 사람과 함께 하는 경험은 감정을 건드리고 고정된 세상을 바꾸기도 하나보다.
“응!
주위에 있는 분들이 여유가 있었거든.
나도 덩달아 편해지더라.
물론 큰 수술 후 다닌 거라 몸상태가 이만저만 아니었지만
다람쥐처럼 어서 회복이 되더라고
다시 학창 시절로 돌아간 거 같기도 하고 말이지
자연이 사람에게 힘을 주네-
가장 큰 깨달음은 나는 정서적으로 참 메말라 있었네 싶고”
얼마 전 재미 삼아했던 mbti 검사표가 떠올랐다.
“엄마가 극 mbti T로 나왔으니... 그렇죠?”
그러다 늘 엄마가 내게 하던 말이 갑자기 떠올랐다.
“엇 그러고 보니까
엄마 꿈에 대해 저 꼬마 때 얘기한 적 있어요!”
엄마에 비해 표현력도 많고 섬세했던 나는 지난 시간들이 생생했다.
“엄마가 그런 말도 했어?”
엄마의 인생을 들으며 같이 속상해하기도 했고 감정을 고스란히 공유했었다.
“그럼요, 저 다 크고 나면 대학교 같이 다니고 싶다- 했었잖아요
기억 안 나요?”
지난 이야기를 이것저것 꺼내자 엄마도 마침 기억이 나는지
“어? 정말이네”
유독 삼촌을 예뻐했던 외할머니에게 엄만 서운한 감정이 있었다. 캠퍼스 생활을 하고 싶었으니까. 직장 다니면서 유사한 과정은 경험할 수 있었지만, 그 로망에 대한 미련이 늘 있었다.
“꿈을 이뤘네 드디어 이뤘네
첫사랑에 대한 꿈이 오래된 거네요
지금 다니는 게 어쩌면 인생학교죠 뭐”
엄만 내게 비밀을 털어놓듯이 이야기를 꺼냈다.
“어쩌면 철드는 것보다 5년 동안 감성을 느끼는 게 더 힘들었거든?
내가 돌 같았다니까 호호
그것도 깨려고 하니까 금이 가긴 하더라”
엄마의 솔직한 마음에 진심이 느껴졌다.
“그럼 진짜 가슴이 뛰는 일을 찾은 거네- 그러니까 감정은 어떻게 변했어요?”
거리낌 없이 엄마는 자신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의 삶도 궁금해졌어
세상 무심한 내가 말이지
카톡답장도 잘 안 하잖니
자존심도 강한 편이고
그런데 거기서 만큼은 진솔해지고 싶었어
부족한 점도 툭툭 털게 되고
그러니까 사람들이 더 나를 자주 찾더라”
이제와 돌이켜보면, 내가 어릴 적 친구들을 집에 데려오면 유독 싫어하셨다. 또 그렇게 내가 당신처럼 성장하기도 바라셨다.
“그전엔 사람들이랑 어울리는 게 불편했겠네요”
나는 요즘 엄마가 그런 점에서 사뭇 달라졌다는 걸 알아차리고 있었다
“그렇지..
너희들 교육시킬 때도 마음에 걸리는 게 많았어
그냥 내가 최고라고 생각하면서 너희들 키웠거든
스스로 만든 장벽이랄까?
아이들 커갈 때 내가 조금만 더 마음을 잘 알아주었더라면 참 좋았겠다 싶었어
넌 요즘 꿈이 뭐야?”
고된 알바, 공부 끝나고 갑자기 턱끝같이 찾아온 근육통이 떠올랐다. 그게 시작이었기 때문이다.
“전 음...
사실 저도 아팠잖아요
20대를 통째로 날릴 만큼요”
공허하고 외로웠던 내 마음이 엄마에게 전해진 듯했다
“그렇지 너, 이른 나이에 아팠지...”
얼마 남지 않은 화과자를 입에 쏙 넣었다. 달큼한 향이 입안에 돌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까,
유니크하고 매혹적인 할머니가 장차 될 거예요”
예상치 못한 나의 대답에 엄마가 깔깔 웃었다.
“푸핫? 그렇게 말해도 되는 거였어?”
희미했던 생각들이 선명해지자 나도 모르게 마음이 두근거렸다.
“그럼요-
제가 진짜로 일상 속에 지친 걸 뼈저리게 느껴서 그런가
그런 사람들에게 마음에 안식처가 될만한 콘텐츠를 꼭 기획해보고 싶어요”
"그래서 당장 해보고 싶은 건 있고?"
내 생각을 좀 더 진하게 정리해주고 싶은 엄마의 의도가 느껴졌다.
그렇다. 현재 나는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다. 그동안 부모님의 뜻과 내 마음과 같지 않아 티격태격하기도 했지만 말이다.
“이렇게 이야기 나누는 것도 행복해요
글이 되었든 영상이 되었든 제 재능으로 구현할 수 있는 거라면
활용해보고 싶어요
유년시절엔 워낙 엄마가 엄했잖아요
교육관도 확고했고요
그래서 저도 아프면서 저를 제대로 알아차렸거든요
많이 넘어졌죠, 또 일어서고
그만큼 씩씩해진 것도 있고
그래서 그런지 꿈을 실현하고 싶다거나 자아실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저도 모르게 눈이 반짝한달까?
그런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가 되고 싶고요
내가 무얼 할 때 기쁜지 안다는 거
그거 진짜 행복이잖아요
엄마랑 나랑 어쩌면 나이 차이가 제법 나는 만큼
살아온 시공간도 제법 다른데
이걸 공유한다는 게 또 하나의 재미기도 하고요
화과자 요것 참 달달구리한데
인생은 요 말차처럼 참 쌉쌀하단 말이죠 헤헤
참 재밌다 ”
북적이던 카페에 사람들이 서서히 빠져나가자, 유독 엄마의 목소리가 잘 들렸다.
“엄마가 어릴 때 너 같은 친구 있었음
좋았겠네
엄만 네가 참신해서 좋아
엄만 참 한결같잖니”
턱근육에 이상이 생겨 말도 못 하고 집에만 콕 처박혀 있어야 했던 지난 날들.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치료받고 나서야 또래 친구들처럼 일을 하러 나갈 수 있었다. 여러 사람들을 만나면서 언제쯤 나는 나다운 일을 해보나 싶기도 했지만, 그만큼 세상 구경은 제대로 할 수 있었다는 것. 그래서 나다운 게 가장 정답이라는 것도 일찍 배웠다.
“한결같은 것도 매력이고
엄마의 고유성이니까
그냥 그게 가장 예쁜 거예요”
돌이켜보면 너무나 다른 성향을 지닌 엄마와 나지만 다시 인생을 시작해 보려 용기를 내는 것만큼은 똑 닮았다고 느꼈다. 엄마도 동의를 하듯이
“네 색깔 힘들게 찾은 만큼
계속 진하게 칠했으면 좋겠어”
"저번에 어디에서 글인가 뭘 봤는데
사과 있잖아..”
“오잉 사과?”
“응!
사과 반으로 쪼개면 뭐가 있게?”
“과육이랑 씨앗?”
“씨앗 반으로 쪼개봤어?”
“네! 그냥 단면..이었던 거 같은데요?”
“자세히 보면 거기에 배유라는 게 있어
그런데 그게 나중에 사과나무가 된다던데?
가능성인 건지
그 조그만 게 말이야
그래서 작은 가능성이라도 놓치지 말라고 적혀있더라”
“맞아요
가끔 뭐든지 열심히 하다 보면
결실이 잘 안 나와서 중단하고 싶을 때 있잖아요?
그래도 계속하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하고 있는 게 진심이라면요
나무는 자라긴 하더라고요
늦게 자랄 때도 있고 빠를 때도 있고요
그렇죠?”
어느새 저녁이 되자, 창문에 나비치던 그림자는 사라지고
서늘한 바람이 보드랍게 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