덥고 습한 것이 싫었고 춥고 건조한 건 더더욱 싫었다. 선선한 바람에 벚꽃잎이 흩날리고 단풍잎이 자박자박 쌓인 거리를 걷는 걸 좋아하던 나는 이제 뜨거운 여름 햇볕을 좋아하게 됐다. 여름만 되면 휴가를 내고 집에서 에어컨 바람에 몸을 맡긴 채 하염없이 늘어져만 있던 나는 어쩐 일인지 요즘 들어 그렇게 밖을 나서고 싶어진다.
바닷가에서 조막만한 비치타월을 대충 깔고 무려 칠링백에 얼음과 함께 담아와 시원해진 와인병의 코르크 마개를 주섬주섬 따고 있는 게 귀찮지가 않다. 좋아하는 노래들을 연속 재생하며 해변을 거닌다. 피부가 타는 걸 두려워하지 않고 수영복 차림으로 시원하게 바다에 풍덩 빠져본다. 제대로 수영을 배워본 적도 없으면서 겁도 없이 패들 보드를 타고 저 멀리 뒤돌아보면 해변의 사람들이 개미만 해 보일 때까지 패들을 저어봤다. 바다 수영 후 덜 마른 머리카락에서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채로 맥주 한 캔을 꼴깍꼴깍 마신다. 시원시원한 차림의 여행객들이 까맣게 그을린 피부를 뽐내며 젊음을 분출한다. 그들을 따라 나도 청춘을 불태우고 느지막이 집에 들어가면 열대야에 지쳐 문을 활딱 열어 둔 채로 자다 모기떼에 습격을 당하기도 한다. 아, 물론 이건 정말 싫다.
어릴 땐 야외에서 수영을 하고 나면 공중 샤워장에서의 대충대충 할 수밖에 없는 샤워도 그렇고 젖은 발에 달라붙는 모래가 너무 싫어서 언젠가부터 물놀이를 멀리했다. 요즘은 무슨 바람이 든 건지 그런 게 하나도 귀찮지가 않다. 오히려 언제 물에 들어가고 싶어질지 모르니 수영복 위에 가벼운 옷을 걸친 채 여행을 다니고 항상 젖어도 되는 샌들을 신고 다녔다. 그러니까 나는 여름을 좋아하는 사람이 되었다.
크림 파스타를 싫어하던 청소년은 자라서 크림 파스타가 없어서 못 먹는 사람이 되었고, 낯가림이 심해서 친한 친구 몇 명과만 연락을 주고받던 소심이가 이제는 낯선 사람들과의 만남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자기계발서만 읽던 독서 편식러가 어느새 소설만 주야장천 읽는 소설 편식러가 되었고 아메리카노만 마시던 회사원은 우유의 고소함을 안 이후론 라떼만 마셔댄다. 그리고 여름을 싫어하던 나는 여름을 좋아하게 되었다.
내일모레면 서른인 나는 “나도 이제 다 컸다, 어른이다.”라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성장 중인가 보다. 입맛이 변하고 취향이 변하고 성격이 변하고. 이젠 다 커서 어느 정도 중심이 잡혔다고 믿었던 과거의 내가 오만하게 느껴질 정도로 나는 아직도 변화하고 또 변화하고 있다. 변하지 않는 거라곤 성장기 이후로 더 이상 나빠지지 않는 시력 정도랄까.
변화된 모습이 항상 마음에 든 건 아니지만 이번 변화는 썩 마음에 든다. 피부가 타는 걸 두려워하지 않게 되니 여름에 할 수 있는 게 얼마나 많은지. 좋아하는 계절인 만큼 좋아하는 일들을 많이 많이 해두고 두고두고 그 기억으로 올해를 견뎌보려 한다.
저는 지금 여름이 참 좋은데, 지금의 여러분을 무얼 좋아하고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