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원이 되고 싶어 - 박상영
스포일러 주의!
사춘기의 나는 가시를 곤두세운 고슴도치 같았다. 솜털 같은 부드러운 자극에도 마치 바늘에라도 찔린 듯 펄쩍펄쩍 뛰기 바빴고, 나를 해하려는지 도우려는지 도무지 알 수 없어 그게 누구든 닥치는 대로 밀어내기 바빴다. 좋아하는 친구에게 좋아한다는 걸 들키기가 죽기보다 싫었지만 몸의 부피보다 커질 대로 커진 마음은 그 친구 앞에 서면 비질비질 새어 나왔다. 나의 약한 부분은 손톱만 하게 꼬깃꼬깃 접어 저 깊숙이, 나도 꺼내보기 힘들 만큼 깊숙이 숨기고 하늘을 찌를 듯 높은 자존심과 허세를 풍선처럼 부풀리고 부풀려 밟고 올라섰다. 당연한 거겠지만 풍선을 밟고 올라선 나는 휘청휘청 중심을 잡지 못하고 넘어지고 미끄러지길 반복했다. 매번 넘어지면서도 그 허영을 포기하지 못하던 사춘기 소녀. 지금 생각해도 매 순간순간 세상이 내게 너무나도 고자극이었던지라 “다시 그때로 돌아갈래?”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단 1초의 고민도 없이 “싫어!”라고 외칠 것이다. 그런 나를, 대부분의 삶들이 그렇듯 사춘기가 인생 최대 흑역사인 나를, 강제로 그 시절로 돌아가게 만드는 책을 만났다. 다들 고슴도치로 돌아가 볼 자신이 있다면 같이 『1차원이 되고 싶어』의 첫 페이지를 넘겨보자. 아, 물론 나는 예상치 못한 과거로의 회귀로 장시간 정신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 점 참고하시길….
이야기는 화자인 “나”가 같은 학교, 학원을 다니는 “윤도”에게 몰래 초콜릿을 선물하는 장면을 “무늬”에게 들키면서 시작된다. “무늬” 앞에선 끈질기게 아닌 척 연기했지만 실은 “나”는 “윤도”를 짝사랑했다. 그러다 우연찮은 계기로 “윤도”와 대화를 섞게 되고 이내 둘은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하지만 그 둘의 관계는 어딘가 이상하다. 단둘이 있을 때는 둘도 없는 친한 친구, 아니 친구 이상의 관계로까지 보이지만 공개적인 장소에선 언제 친했냐는 듯 의식적으로 서로에게 거리를 둔다. 그들은 이 알쏭달쏭한 관계를 지속하며 서로 사랑하는 사이로 발전하지만 그 누구에게도, 심지어는 스스로 조차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어떠한 단어로도 말끔히 정의 내릴 수 없는 이 애매한 관계가 좋게 말하면 섬세한, 안 좋게 말하면 예민 그 자체인 사춘기 소년들을 심리적 벼랑 끝까지 몰아갔다. 설상가상으로 가족과 친구들의 문제도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쏟아지자 그들은 정신을 차릴 수 없다. “나”는 견딜 수 없는 외부 자극에 분노하고 자괴하고 두려워한다. “나”는 이따금씩 천장이 자신을 짓누를 듯 압박해온다며 두려워한다. 2차원의 세계가 불러일으키는 불안정함에서 벗어나 1차원이 되고 싶지만 슬프게도 세상은 2차원도 아닌 3차원인 것을. 『1차원이 되고 싶어』는 한 문장으로 정의하자면 점과 점이 될 수 없는 면과 면, 공간과 공간과 같은 복잡다단한 청소년들의 이야기가 아닐까?
나는 책을 느긋하게 읽는 편이라 책 한 권을 다 읽는데 꽤나 시간이 걸리는 데, 『1차원이 되고 싶어』는 정말 단숨에 읽어 내렸다. 추리 소설도 이 정도로 흡입력이 있진 않았는데 잔잔한 표지와는 다른 색다른 매력이 있는 책이었다. 회사에서도 다음 내용이 궁금해 내내 동동거리다 점심시간이 되면 밥을 거의 마시다시피 먹은 후 남은 시간 동안 책을 읽었다. 그렇다 해서 마냥 술술 읽어지는 책은 또 아니었다. 앞서 말했다시피 자꾸 내 과거 흑역사를 끄집어내는 장면들이 많아, 숨이 턱턱 막혀 다음 장을 넘기는 손이 떨려오기도 했다.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동시에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드는 이 책의 매력이 무엇일까?
주변 사람들의 비난이 두려워 내 마음에 솔직하지 못하고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지독히도 이기적이게 행동하지만 그런 스스로를 용서할 자신도 없다. 사랑 앞에서 누구보다 무모했지만 뜻밖의 현실의 벽을 만나며 그 사랑에 급브레이크가 밟혔다. 오해에서 시작된 시기, 질투 그리고 원망은 뒤늦은 후회를 불러일으켰다. 약육강식의 세계와도 같은 학교에서 물어뜯겨지지 않으려 악착같이 학교생활을 버텨냈지만, 그래서 내가 얻은 건 과연 무엇인지 입 밖으로 선뜻 내뱉을 수 없다. 남은 건 알맹이 없는 허세뿐. 『1차원이 되고 싶어』는 학창 시절 누구나 겪어봤을 사춘기 소년 소녀의 모습을 정말 필터링 하나 없이, 날 것 그대로 보여준다. 책을 읽는 내내 가장 많이 떠오른 생각은 “진짜 다 왜들 저러는 거야 …. 아 맞다, 나도 그랬었지 참….”이다. 등장인물들의 때론 바보 같고 때론 끔찍한 선택들이 끊임없이 내 과거의 모습에 투영되어 나는 공감하고 대리 수치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나”를 사랑하지만 그런 자신을 인정하지 못해 상처 주는 말로 비수를 꽂던 “윤도”도, 일방적으로 공감을 강요하며 아웃팅 협박을 하던 “태리”도, 그런 “태리”의 아픔을 알면서도 나 자신의 안위를 위해 철저히 외면했던 “나”도, 질투심에 “나”를 괴롭히는 문자를 보낸 “희영”도. 그들이 모두 왜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너무나도 잘 알기에 그들을 미워할 수 없었다. 오히려 그들의 불안과 슬픔을 위로해 주고 싶었다. 우리는 결국 이 다사다난한 사춘기를 거쳐야만 뿌리를 땅 깊숙하게 내릴 수 있다. 부는 바람에 이리저리 휘청거리는 시간을 겪어야 필연적으로 뿌리를 더 내릴 결심을 하게 된다.
삶은 불완전한 채로 태어나 완전함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라 생각한다. 불완전한 나에게 경험과 사랑, 고민 등의 지지대를 덫 대고 덫 대어 무너져 내리지 않도록, 보다 완전해지도록 중축하고 리모델링하는 과정이다. 물론 그렇게 덫 대고 덫 대어도 삶의 끝이 항상 완전함으로 끝나진 않지만, 적어도 10년 전의 나보다는, 어제의 나보다는 현재의 나는 완전함에 더 가깝다. 『1차원이 되고 싶어』는 내가 생각하는 완전함을 향해 나아가는 성장 과정이 그대로 담겨있는 작품이다. 인물들은 모두 불완전하던 시절 저지른 과오를 조금 더 완전해진 후 뉘우치고 사죄한다. 아버지의 장례식에 찾아와 준 “나”에게 “윤도”는 때늦은 사과를 했고 “희영” 역시 편지로나마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으며 사과를 한다. 그리고 “나”는 잊으려 애쓰고 애썼던 자신의 잘못을 대면하러 “태리”를 만나러 간다. 인물들은 모두 유리 조각처럼 불안 불안하던 시간을 거쳐 조금은 성숙해진 모습으로 이야기가 끝이 난다.
거창한 말들로 장황하게 늘어놓았지만 한마디로 정말 재밌었다. 한동안 소설을 멀리하고 있던 차에 제목에 이끌려 읽기 시작한 게 지금은 박상영 작가에게까지 홀린 듯 끌려가고 있다. 책이 주는 메시지도 메시지이지만 이 사람 참, 글도 재미나게 쓴다. 언뜻 보면 우울한 성장 소설일 것 같지만 “나”와 “무늬”의 유머러스한 대화 장면들은 나의 유머 코드를 자극해 눈물이 고인 채 읽다가도 갑자기 큭 하고 웃게 만들었다. 사람 난감한 게 자꾸 울리고 웃기고를 반복하더라.
여름 이미지가 강렬한 책이었던 만큼 내년 여름 즘 다시 한번 읽어봐야지 다짐하는 하루다. 사랑해 마지않는 구절들을 끝으로 이만 글을 마무리하겠다.
이따금 샘물처럼 솟아나, 쓰나미처럼 내 마음을 덮치는 생각들. 나의 마음은 지금 어디에 와 있고, 윤도의 마음은 또 지금 어디까지 와 있는가. 나는 왜 이토록 윤도를 갈망하며, 그의 모든 것을 장악하고 싶어 하는가. 갈수록 짙어지고 검어지는 마음 때문에 하루에도 몇 번씩 가라앉았다가 다시 솟아오르는 감정의 요동을 겪던 나는 잊을 수 없는 뜨거운 여름을 맞았다. (p109)
나도 모르게 뺨으로 뜨거운 액체가 흘러내렸다. 땀인지 눈물인지 알 수 없는 액체가. 윤도는 그런 나를 한동안 바라보다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그런 표정으로 울면 싸우자는 건지 위로해달라는 건지 알 수가 없잖아.” (중략) 윤도를 마주 안은 채 나는 윤도가 차라리 나에게 화를 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나는 윤도의 얼굴을 흠씬 때리고, 곤죽이 되도록 얻어맞고, 있는 힘껏 소리를 치며 쌍욕을 하고, 우리가 나누었던 모든 것을 깨부술 것이다. 그렇게 우리 둘을 잇고 있다고 믿었던 인연의 끈이 뜯겨나가 버렸으면 좋겠다. 아예 아무것도 아닌 사이가 되어 그저 서로에게 사물 같은 존재가 되어버렸으면 좋겠다. 그럼 이토록 가파른 감정의 기복을, 차라리 통각에 가까운 이런 감각을 느끼지 않을 수 있었을 텐데. (p258)
왜 나랑 함께하지 못하는데?
살아 있으니까. 지금의 내 삶이 있으니까.
이 삶은 가짜야. 아무것도 아니야.
아니야. 진짜야. 너무 진짜야. 지금 우리가 함께하고 있다는 것만큼이나 진짜야. (p3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