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붑니다

by 서윤

바람이 붑니다

창문이 덜컹 댑니다

어느 먼 땅에서 누군가 또

나를 생각하나 봅니다

ㅡ 사람과 사랑과 꽃 (나태주 )




바람이 붑니다


기억은 일회용 물수건 같습니다

빨아 써도 되고 버려도 되는 수건 아시죠 ?


오늘 아주 옛날 기억이 떠올라서 진부한 추억이야기 한편 꺼내보았습니다.

그 시절엔 창피했던 일이 시간 지나고 먼 이야기로 남았을 때 더없이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아 가끔씩 꺼내놓으면 마음이 포근해지는 일이 있습니다.

내가 네모난 단발머리 중학생이 되었습니다. 네모난 가방에 네모난 책과 네모난 공책과 네모난 필통을 담았습니다. 십리를 걸어 다니던 국민학교 ( 초등학교 ) 를 지나 다시 십리를 더 가야 하는 중학교 이제 걷는 게 아니라 버스를 타고 갑니다.

어느 날 아침 마루 기둥에 놓여 있던 가방이 사라졌고, 한참을 찾고 있는데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어머니가 " 니 애비가 들고나갔어 빨리 버스 타러 가 " 하시는데 무슨 말인지 이해할 듯, 못 할 듯 애매한 표정으로 버스가 서 있는 큰 길가 마당으로 달려갔습니다. 그곳에 머리가 허연 아버지가 버스 문 앞에 서서 발 하나를 버스 계단에 올려놓고 시위하듯 서 계셨습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나는 너무 창피하고 부끄러운데 아버지는 너무나 태연하게

" 앞자리에 가방 올려놨어 앉아서 가 " 하시는 겁니다. 동네 친구들은 일제히 나와 아버지를 쳐다보고 기막혀하는데 내 얼굴은 홍당무가 되어버렸습니다. 잘 다녀오겠다 인사도 안 하고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자리에 앉았는데, 아버지는 닫히는 버스문에 대고 " 공부 잘하고 점심밥 꼭 먹어야 혀 " 하시고는 아무 일 없는 듯 손을 흔들고 계셨습니다. 딸래미 앉아서 가라고 자리를 맡아놓으신 겁니다. 그리고 매일 아침마다 나의 책가방을 들고나가셔서 똑같은 행동을 하셨습니다. 양반이라고 비가 와도 절대 뛰지 않는 아버지, 큰 소리 한번 안 내시는 양반타령 노인이 막내딸 일에는 불같이 화를 내시고 양반 체면이고 뭐고 앞뒤 안 가리던 아버지였는데 그땐 늙은 아버지가 너무 싫고 창피해서 제발 친구들 앞에 안 오시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시집간 막내딸이 아이를 낳아 안아보시라고 했더니 아이를 슬쩍 밀어내시며 " 힘들게 그건 뭣하러 낳았어 " 하시는 말이 서운해서 한동안 아버지를 원망했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그 아버지가 아주 먼 곳으로 가시고 가끔 바람이 창문을 흔들면 아버지가 오셨나.

내가 어찌 사나 보고 가셨나. 허공에 손을 저어 보기도 합니다. 이제 내 머리에도 흰머리가 올라왔지만, 아버지 생각을 할 때면 여섯 살 어린아이가 되어버립니다.

어머니 고집에 새 교복도 못 입고 남이 입던 교복을 위아래 색깔도 다르고 맞지도 않게 입고 입학식에 가면서도 아버지 마음 속상할까 봐 싫다는 내색도 못했던 그때 속으로는 아버지가 좋고 든든하면서 겉으로는 창피하다고 말했던 철부지 시절을 사는 내내 후회를 합니다. 그 딸이 지금 아버지를 부르며 또 눈물도 글썽입니다. 아버지 없는 세상도 여전히 잘 흘러갑니다.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면서 한 해 소원을 빌었던 게 엊그제 밤인 것 같은데 벌써 설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번 설에는 아버지를 만나러 좋아하시던 커피와 담배를 사들고 가야겠습니다. 비바람 때문에 창문이 흔들렸는지 아버지가 다녀가신 건지 오늘 밤에는 유난히 바람이 심하게 붑니다. 그리움이 깊어 마음에서 바람을 만들어 내고 있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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