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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먹는여우랄라 Sep 18. 2023

오늘 아침, 플레이리스트

어른, 언젠가는, 바람의 노래~


이른 아침이었다.

여느 때보다 빨리 몸을 일으킨 건 어제의 여운이 남아서다. 잠들기 전 우연히 들은 노래 가사에 매료되어 메모장에 적어두었다. 더듬더듬 어제 그 메모를 찾아들고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가사 검색을 통해 노래를 찾았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의 ost 중 ‘어른’이란 노래다.





[어른]- 나의 아저씨 ost 중에서


‘눈을 감으면

내게 보이는 내 모습

지치지 말고 잠시 멈추라고

깰 것 같지 않던

짙은 나의 어둠은

나를 버리면

모두 깰 거라고

(...)

나는 내가 되고

별은 영원히 빛나고

잠들지 않는

꿈을 꾸고 있어

바보 같은 나는

내가 될 수 없단 걸

눈을 뜨고야

그걸 알게 됐죠

어떤 날 어떤 시간 어떤 곳에서

나의 작은 세상은 웃어줄까





노래를 듣는데 눈물이 난다.

‘요즘 고단했던 걸까?’

아니다.

요즘 고단한 게 아니라, 모든 삶엔 건드려질 수 있는 고단함이 담겨있다.

어릴 땐 ’ 타인에게 보이는 내 모습‘에 민감했었다. ’ 어떻게 꾸며야 호감을 살 수 있을지, 어떻게 행동해야 좋은 사람처럼 보일지, 어떤 말을 해야 똑똑하고 지혜로운 사람 취급을 받을지 ‘에 연연했었다.

성인이 되고 나이가 들며 얻게 된 사람과의 오랜 관계와 경험은 타인의 시선 따위 헛됨을 알려주었는데, 그럼에도 고뇌는 끝나지 않았다. 이제는  ’ 내게 보이는 내 모습‘으로 시선이 기울었기 때문이다. 내가 품은 기대와 가치에 현실이 가 닿지 못하였음을 볼 때 나는 젊을 때 보다 더 깊이 좌절한다. ’ 지치지 말고 잠시 멈추라고 ‘라는 가사에서 잠시 눈을 감는다.



노래 사이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아침잠에서 깬 아이가 부스스한 모습으로 내게 와 안긴다. 아이에게 노래를 들려주며 말을 건넸다. 이 노래 아느냐고. 방금 안겼던 아이인데 사춘기 증세는 아침에 더 압도되는지 금세 까칠해져서 ’ 아침부터 왜 이래?‘한다.

’ 가사가 참 좋다. OO야.‘ 했다.

나는 이 기분을 깨고 싶지 않다. 아이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는 것으로 나의 의사를 아이에게 전달한다.



나이가 주는 지혜가 있다. 이 모든 순간과 감정도 곧 지나갈 거란 걸 안다는 것이다. 잠시 흘렸던 눈물도 금세 지운다. 그리곤 다시 비슷하게 떠 오르는 노래를 틀었다.





 [언젠가는] - 이상은     


젊은 날엔 젊음을 모르고

사랑할 땐 사랑이 보이지 않았네

하지만 이제 뒤돌아 보니

우린 젊고 서로 사랑을 했구나

눈물 같은 시간의 강 위로

떠내려가는 건 한 다발의 추억

그렇게 이제 뒤돌아 보니

젊음도 사랑도 아주 소중했구나

언젠가는 우리 다시 만나리

어디로 가는지 아무도 모르지만

언젠가는 우리 다시 만나리

헤어진 모습 이대로






아침부터 수학 문제를 풀며 밥을 먹는 모범생이지만 때로 무지하게 시크한 사춘기 그녀에게 가사를 들어 보라 말한다. 그리고 어제 글쓰기 강좌에서 만난 중3 여학생에 대해 말을 꺼냈다.


 “OO야 글쓰기 강좌에 빠지지 않고 나오는 학생이 있었거든. 엄만 그 학생이 고3이겠거니 생각했어. 고3이니까 문창과를 준비하며 글을 쓰려는구나.‘하고 말이야. 그래서 물었지. 몇 살이냐고. 그랬더니 중3이라는 거야. 세상에 고3이어도 기특한데 중3이 도서관 수업에 나와 글을 쓰고 있다니 대단하지?”



아이는 내 말을 듣는 것도 같고 안 듣는 것도 같다. 그래도 나는 이야기를 이어간다. 사춘기 아이가 아무 대꾸가 없다는 것은 ‘듣고 있다’ 혹은 아직 ‘그녀의 심경이 요동치지 않고 편안하다는 표시’이기 때문이다. 살살 더 이야기를 끌어간다.



“그래서 엄마가 막 칭찬해 줬어. 지금 이런 도전을 하는 게 얼마나 멋진 일인지 모른다고. 응원한다고 말이야. 이 노래 가사가 얼마나 멋지니! 삶은 그 순간에는 가치를 잘 모르거든. 사람은 늘 지나고 나서야 깨닫고 후회해. 그러는 사이 스스로도 모르게 나이가 들지. 그런데 말이야. 진짜 신기한 건, 가끔은 이걸 나이가 들기 전에 깨닫는 사람들이 있어. 그런 사람은 참 부럽더라. 가수 이상은은 20대에 어떻게 이런 가사를 썼을까? 어제의 그중3은 어떻게 벌써 좋아하는 일에 용기를 낸 걸까? 우리 딸도 엄마보다 조금은 빨리 알았으면 좋겠다.”



나는 지난 시간 중 일에 관한 어떤 부분들은 깊이 후회할 때가 있다. 고난과 실패 앞에서 쉽게 좌절했던 순간들과 지금 생각하면 사소해 보이는 이유들로 내가 가야 할 길들을 쉽게 놓았던 순간들을 말이다.


‘모두가 소중하다는 것을 그때 이해했다면 조금 더 버텼을까?’

‘그 모든 과정이 이유가 있음을 알았다면 더 깊이 사랑했을까?’

되돌아본다.


아이는 여전히 아무 반응이 없다. 다행이라 여기며 나의 아침 플레이리스트를 이어간다. 다음 노래를 튼다. 나는 이미 노래에 취해있다. 한곡만 더 듣고 싶다. 작년부터 빠져있던 그 노래.





[바람의 노래] - 뜨거운 씽어즈(원곡 조용필)


살면서 듣게 될까

언젠가는 바람의 노래를

세월 가면 그때는 알게 될까

꽃이 지는 이유를

나를 떠난 사람들과 만나게 될 또 다른 사람들

스쳐가는 인연과 그리움은 어느 곳으로 가는가

나의 작은 지혜로는 알 수가 없네

내가 아는 건 살아가는 방법뿐이야

보다 많은 실패와 고뇌의 시간이

비켜갈 수 없다는 걸

우린 깨달았네

이제 그 해답이 사랑이라면

나는 이 세상 모든 것들을 사랑하겠네






작년에 한참 재미있게 보던 [뜨거운 씽어즈]란 프로그램의 남성팀 노래다. 영상 속 남성들은 배우이거나 가수, 아나운서 등 방송계에서 일하는 다양한 직군의 사람들이다. 이들 가운데는 오랜 세월 무명의 시간을 보낸 이들이 있다. 이들은 노래에 앞서 과거의 자신에게 영상 메시지를 보내는 장면이 나오는데, 다들 한결 같이 지난한 시간을 버텨낸 젊은 날의 자신에게 수고했다고 격려하고 불안하고 걱정되겠지만 괜찮다며 위로와 응원을 보낸다. 마치 오늘 아침 노래를 들으며 힘든 시간과 걱정을 떠 올리는 나를 격려하고 위로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 뒤로 이어지는 노랫말들이 다시 오늘, 힘을 내게 해 준다.


 ‘사람들은 어떻게 이런 멋진 노랫말을 생각해 내는 걸까?’ 세월이 가면 정말 알게 될까? 우리의 삶의 이유를. 그 많은 실패와 고뇌의 이유를?’



노래 가사처럼, 살면서 언젠가 바람의 노래를 듣고 싶다. 더불어 이 세상 모든 것들을 사랑하고 싶다. 내 젊은 시절의 아쉬움도, 지금의 후회도, 가끔씩 찾아드는 인생의 고뇌도. 모두 사랑하게 되었으면 한다.


일찍 일어난 탓에 아침이 긴 것도 나쁘지 않다. 사춘기 버튼이 빨리 눌리지 않아 아이와 노래를 함께 들을 수 있는 지금 이 순간도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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