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하탄 프로젝트 2
원자탄, 절대반지
맨하탄프로젝트가 시작한 후부터 원자탄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되기까지의 역사를 보면, 나는 루즈벨트대통령이 불시에 죽지 않고 살았더라면, 원자탄이 수많은 사람들이 사는 도시 한복판에는 투하되지 않았지 않았을까하는 상념에 휩싸이곤 한다. 영화 <반지의 제왕>의 인물들에 비교하면, 프레드릭 루즈벨트대통령은 절대반지의 유혹을 견딜 수 있었던 유일한 인물 '프로도' 혹은 '간달프'일 수도 있지 않았을까하는 기대섞인 상념이 드는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원자탄이 발명되어 첫 폭발실험이 이루어진 1945년 7월 16일 당시, 루즈벨트대통령은 이미 고인이 되어 있었다.
원자탄투하가 태평양전쟁을 끝내기 위해 꼭 필요했었는지를 살펴보려면, 원자탄발명이 가시화되기 시작한 때부터 트루만행정부가 어떠한 일련의 행동들을 취하였는지를 살펴보아야한다.
중간위원회 (Interim Committee)
1945년 5월, 뉴멕시코주 북중앙의 파자리토 고원지대에 위치한 로스 알라모스 (Los Alamos)에서는 맨하탄프로젝트가 최종단계로 치닫고 있었다. 이때 트루만정부는 임박한 원자탄에 대한 정책을 논의하는 '중간위원회(Interim Committee)'를 결성한다. 그당시 전쟁담당 장관이던 헨리 스팀슨을 위원장으로 하고, 그 당시 트루만정부에서 성공적 전쟁수행을 위한 과학연구정책을 이끌어가던 저명한 화학자 제임스 코난, 공학자 배니바 부시, 물리학자 칼 콤톤, 그리고 국무부 차관보 윌리엄 클레이톤과 해군차관 랄프 바드 가 멤버였다. 그리고 트루만대통령의 의중을 대변해 줄 수 있는 또 한 멤버가 추가되었는데, 그는 2개월 후인 7월3일에 국무장관에 임명된 제임스 번즈였다. 이 위원회는 5월 한달 동안 네차례의 모임을 가지고, 원자탄발명이 미치는 군사적, 외교적 영향을 논의하고, 미정부가 태평양전쟁에서 어떻게 원자탄을 사용해야하는지, 종전 후에는 원자탄과 원자력을 어떤 식으로 이용하고 관리를 해야하는지에 대한 결론을 내리고, 그 보고서를 트루만에게 전달하였다.
여기에서, 히틀러는 이미 4월 30일에 자살을 하였고, 독일은 각각 5월 7일과 9일에 서부전선과 동부전선에서 무조건적 항복을 하였음을 기억하여야한다. 그러니까, 이 중간위원회는 유럽에서의 전쟁은 끝난 후라는 것이다. 이제, 아시아전선에서 일본제국주의와의 전쟁만 남은 상태였음을 기억해야한다.
중간위원회가 가장 중요하게 고려를 한 사항은 미국의 전후 외교정책이었다. 이 위원회가 고려한 미국의 외교정책에 어떻게 원자탄이 중요했는지를 보여주는 결론은 두가지다. 첫째는 미국의 원자탄과 원자력사용의 독점을 위한 노력을 해야한다는 것이었다. 5월 18일 모임에서 위원회는 미국이 원자탄을 비롯한 원자력 기술에 대한 독점을 얼마동안 유지할 수가 있는지를 논의한다. 부시와 코난은 기술적인 측면에서 볼때 소련이 3-4년이면 따라올 수 있다고 보고한다. 이 두 과학자의 예견대로, 1949년에 소련은 원자탄실험에 성공하였다. 그 뒤를 이어, 1952년에 영국이, 1960년에 프랑스가, 그리고 1960년대 중반에 중국과 이스라엘이 원자탄보유국이 되었다. 이에 반해 그로브장군은 미국이 20년을 독점할 수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로브의 주장에는 미국이 원자탄생산에 필요한 물질 공급에 대한 세계적인 독점을 할 수 있다는 계산이 깔려 있었다. 1943년부터 이미 그로브는 전세계에 매장된 우라늄에 대한 미국의 독점을 위한 노력을 주도해왔었다. 1944년에 미국은 우라늄을 비롯한 원자력에 쓰일 모든 물질과 그 물질에 대한 기술개발을 미국, 영국, 그리고 캐나다 삼국이 독점을 위한 공동노력을 기울인다는 협약을 맺었다. 그 당시에는 우라늄이 매장된 나라는 미국, 캐나다, 벨지움의 식민지였던 콩고 뿐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콩고와 매장된 우라늄을 이 삼국에만 공급한다는 협약을 맺었다. 소련에는 우라늄이 매장되지 않았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로브는 향후 20여년 간 미국이 원자탄에 대한 독점을 할 수 있다고 강하게 믿었다. 그리고 그 주장을 중간위원회의 핵심멤버였던 번즈가 적극 동조 주장하여 채택되었다.
둘째는, 원자탄은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을 상대로 사전경고없이 실제 투하되어야 한다는 결론이었다. 원자탄이 발명이 되기도 전에 이미 트루만 정부의 중간위원회는 일본 본토에 투하되어야한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이 결론은 세계대전 이후의 미국정부의 외교정책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 특히 연합군의 일원이었던 소련과 전쟁 후에는 어떠한 관계를 맺을지에 대한 트루만 정부의 결정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난, 원자탄의 발명이 냉전시대의 시작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물론 그후 5년이 지난 1950년에 일어난 한국전쟁을 거치며 세계는 냉전시대로 진입하게 되었지만, 냉전시대로 가는 시발점은 원자탄발명이었다고 본다. 먼저, 루즈벨트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가졌던 얄타회담을 살펴보자. 그때는 원자탄의 현실화가 가시화되지 않은 시점이었음을 기억하자.
1945년 2월, 그 당시 연합군을 이끌던 3대 강국, 미국, 영국, 소련의 지도자들이었던, 루즈벨트, 처칠, 스탈린이 얄타에서 만나, 전쟁이 끝난 후에 세계의 평화를 유지하기위한 세계체제에 대해 논의를 하였다. 루즈벨트대통령이 죽기 2달 전에 열린 얄타회담이다. 미국과 영국으로 대변되는 자본주의체제와 소련으로 대변되는 공산주의체제가 전후에 어떻게 세계에서 특히 유럽에서 평화적으로 공존할 수가 있느냐의 문제가 그 회담의 주요 의제였다. 얄타회담이 열리던 시점에는 이미 히틀러 독일의 패망은 기정사실화되었다. 미국과 영국 주도의 서방연합군은 이미 프랑스와 벨지움에서 독일을 퇴치하고, 독일의 서부 국경에서 독일군과 싸우고 있었다. 동부전선에서는 소련군이 이미 폴란드, 루마니아, 불가리아에서 독일을 퇴치하고, 독일 동부를 침범하여 베를린으로부터 65킬로미터까지 진격한 상태였다. 얄타회담은 루즈벨트가 원해서 열린 회담이다. 루즈벨트가 그 회담에서 가장 원했던 것은 그 당시 미국이 일본과 벌이고 있던 태평양전쟁에 소련이 군사적으로 참여해주는 것이었다. 소련의 군사적 개입은 일본의 패망을 재촉하고, 일본과의 전쟁으로 인한 미국 군인의 사망자 수를 최소화하는 유일한 길이었다. 얄탸회담에서 세 지도자가 합의를 본 사항중에는, 전후에 독일을 미.소.영.불 4대국이 분할통치하고, 독일의 비무장화와 비나치화하는 것 이외에 유럽을 서유럽과 동유럽으로 나누어, 각각 서방 즉 미.영의 영향과 소련의 영향하에 두기로 하였다. 그리고 모든 국가에서 민주적인 선거를 가급적 빨리 실시하여, 시민들이 자신들의 정부를 결정하도록 하는데 동의하였다. 그리고 루즈벨트는 스탈린으로부터 소련이 일본과의 전쟁을 언제 시작할 것인지에 대한 확답을 받았다. 독일이 항복한 후, 2-3개월 내에 일본과 전쟁을 개시하겠다는 약속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