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윤과의 만남이 끝난 후, 노아와 정민은 이른 저녁을 먹었다. 두 사람 모두 어쩐지 입맛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어느 빵집에서 샌드위치로 떼우는 것으로 합의를 봤다. 저녁을 먹고 한숨 돌린 후, 노아와 정민은 기나긴 하루의 마지막 일정을 향해 차를 움직였다. 재훈과의 미팅이 6시에 잡혀있었다. 약속장소는 여의도에 있는 재훈의 회사였다.
차 안에서 노아와 정민은 별 다른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노아는 본인만의 생각에 빠져 있는 것 같았고, 이는 정민도 마찬가지였다. 정민은 계속해서 노아와 하윤의 대화를 되새김질하듯 곱씹어보고 있었다. 스스로에게 취해 가면을 쓰고 살아온 하윤. 그런 하윤을 적대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공생 중이었다는 도훈. 그리고 이 정신 나갈 것 같은 이야기에 공감대를 표한 노아. 일단 이 세 남자 다 정상이 아닌 건 확실했다.
정민은 문득 창밖에 비가 내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오늘 밤으로 미뤄진 비 예보가 드디어 이루어진 듯했다. 차창을 두드리며 흘러내리는 빗방울들을 바라보던 정민은 노아 쪽은 바라보지도 않고 불쑥 내뱉었다.
“하윤 작가가 정말 범인이 아니라고 생각해?”
“아마도요?”
노아는 별 생각 없이 바로 대답했다.
“만약 이하윤 씨가 한 말의 대부분이 사실이라고 한다면요. 선배는 어떻게 생각해요?”
“난 솔직히 하윤 작가의 말을 어느 정도 믿을 수 있을지 모르겠어.”
정민이 솔직히 말했다.
“난 지금까지 하윤 작가와 도훈 작가가 부딪치는 모습을 몇 번 목격했거든. 사건이 있었던 그날 밤을 포함해서 말이야. 그런데 그게 다 잘 짜여진 연극에 불과했다는 거잖아? 두 사람이 천재 화가인 건 맞지만 천재 연기자라고는 생각하지 않거든. 도무지 믿기지가 않아…….”
“연기를 잘 할 필요가 없었죠. 연기가 아니었을 테니까.”
“그리고 네 추리가 맞다면 범인이 CCTV에 안 찍힌 이유가 설명되는 거 아냐?”
정민이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하윤 작가가 2층에서 계속 돌아다닌 건 맞잖아. 모든 순간이 CCTV에 찍히진 않았을 거 아냐. CCTV 사각지대에 숨은 그 짧은 틈을 타 1층에 있던 도훈 작가를 살해하고 다시 2층으로 되돌아오는 게…….”
한없이 불가능에 가까울 것 같지만 어찌저찌 한다면 가능할 수도 있지 않을까? 정민은 차마 나머지 말을 입밖에 내지 못하고 말끝만 흐렸다. 노아는 차분해보였다.
“불가능은 아니죠. 다만 가능성이 낮을 거라고 생각해요.”
“왜?”
“제가 CCTV까지 직접 다 확인한 건 아니지만…….”
노아가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경찰들은 분명 이하윤 씨가 찍힌 CCTV를 몇 번이고 돌려봤을 거예요. 아무리 피해자가 근력도 없고 기습을 당한 처지라고 하더라도 성인 남성 한 명을 교살하는 일이에요. 최대한 빨리 처리했다 하더라도 몇 분은 걸리지 않았겠어요? 그 정도 공백 기간이 CCTV상 존재했다면 경찰은 분명 이하윤 씨를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했을 거예요. 못해도 강도 높은 심문을 진행했겠죠. 그런데 그러지 않았다는 건…….”
“CCTV에 하윤 작가가 그 정도로 오랫동안 2층을 비운 기록이 없다는 거네.”
정민은 갑자기 힘이 쭉 빠지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넌 그럴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하윤 작가를 그렇게 압박한 거야?”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노아가 태연한 어조로 대꾸했다.
“전 이하윤 씨가 뭔가 숨기는 게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이 사건 관해서 뿐만 아니라 본인에 대해. 그래서 본심을 털어놓게 만들 필요가 있었어요. 그리고 이하윤 씨 같은 사람이 속마음을 얘기하는 경우는…… 거의 없죠. 방금처럼 본인이 살인범으로 몰릴 수도 있다는 위기감을 느끼지 않는 이상.”
“그래. 그 결과 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털어놓은 거지. 사실 본인과 도훈 작가는 서로 돕고 사는 존재였다는…… 아무도 안 믿을 얘기를 말이야.”
“본인이 동기가 없다는 걸 강조하고 싶었겠죠.”
노아가 말했다. 묘하게 두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이하윤 씨의 말이 사실이라면 사건 자체가 완전히 다른 양상을 띠게 돼요.”
“그래? 어떻게?”
“동기적 측면에서 말이죠.”
노아가 설명했다.
“피해자는 분명 화랑관의 어떤 약점을 잡고 김준호 관장을 협박하고 있었어요. 모르는 사람이 봤을 땐 이하윤 씨에게 원한을 가진 피해자가 이하윤 씨의 단독전시회를 망치려는 것처럼 보였겠죠. 하지만 이하윤 씨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하윤 씨와 피해자는 공동전시회를 여는데 아무 거부감이 없었어요. 특히 피해자는 이하윤 씨에 비해 부당한 조건으로 전시회에 참여하는데 불만도 없었구요. 즉, 피해자가 화랑관의 약점을 가지고 협박한 것은 맞지만, 그 협박이 우리가 생각했던 것만큼 심각한 건 아니었다는 거죠. 피해자는 적당히 타협하고 넘어가는 게 오히려 목적이었어요.”
“하윤 작가 말이 맞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
정민이 인정했다.
“그런데 그게 왜?”
“생각해봐요 선배. 전 지금까지 피해자와 화랑관 사이의 이 비밀스러운 미팅을 추적하면서 내심 범인의 동기는 피해자로부터 화랑관을 지키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피해자가 어떤 비밀을 폭로하기 전, 입막음을 한 게 아닐까 생각한 거죠. 그런데 이하윤 씨 말대로라면, 피해자의 입을 다물게 만들기 위해 그를 죽일 이유가 전혀 없었어요. 왜냐하면 피해자는 이 비밀을 이용해 타협불가능한 요구까지 할 생각은 없었으니까요.”
“그래. 도훈 작가의 본심은 그랬을 수 있지.”
정민이 마지못해 수긍했다. 하지만 바로 반박했다.
“하지만 범인의 입장에서 보면 그러지 않았을 수도 있잖아? 어쨌든 그제 미팅에서는 타협이 안 됐으니까. 범인은 도훈 작가를 설득할 방법이 없다고 보고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 수도 있잖아?”
“네. 그것도 가능해요. 완전히 배제할 순 없죠.”
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렇다면,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있어요. 전 이번 살인이 우발적이거나 즉흥적인 대응이었다고 보지 않아요. 철저한 계획살인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모든 면에서…….”
노아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차는 이제 건물 주차장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재훈의 회사가 자리하고 있는 빌딩에 도착한 것이다.
재훈의 회사가 위치한 빌딩은 여의도 중심지에 자리잡은 크고 화려한 신축 건물로 나름 이름있는 중견 기업들이나 로펌, 회계펌들이 여럿 들어서 있었다. 재훈의 회사는 15층, 16층, 17층, 그리고 18층을 렌트하고 있었고 재훈이 있는 사장실은 18층에 있었다. 정민은 재훈의 회사가 정확히 무엇을 하는 회사인지는 알지 못했다. 그의 고객들이 주로 금융기관들이고 한국 뿐 아니라 해외 기업들도 많이 이용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다. 때문에 재훈의 회사는 현재 한국 본사 뿐 아니라 미국에도 지사를 두고 있고 다 합치면 천 명에 가까운 직원들을 고용하고 있다고 했다. 재훈이 워낙 허풍과 허세가 심한 성격이다 보니 이런 소문들도 다 과장된 게 아닐까 생각했는데, 이렇게 호사스러운 빌딩에서 층을 네 개나 통째로 쓰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과장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18층에 도착한 노아와 정민은 프런트 데스크를 지키고 있던 직원의 안내를 받아 바로 사장실 앞까지 도착했다. 사장실의 바로 옆에는 비서실이 있었는데 2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잘생기고 순한 인상의 청년이 두 사람을 맞이했다. 스스로를 재훈의 개인비서라고 소개한 청년은 노아와 정민을 잠시 비서실에 대기시키고 먼저 사장실에 들어갔다. 잠시 후, 청년이 다시 나와 두 사람에게 안으로 들어와도 좋다고 알렸다. 정민은 화랑관에서의 파티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에 조금 멋쩍은 기분이 됐다. 가볍게만 보이던 재훈이 사회적으로 꽤나 위치가 있는 사람이란 사실이 점점 실감이 되고 있었다.
“어서오십시오 노아 기자님! 그리고 정민 기자님!”
재훈은 특유의 쾌활한 웃음과 제스처로 두사람을 맞이했다. 두 사람이 왜 찾아온 것인지 생각하면 이상하게까지 느껴지는 텐션이었다. 재훈은 신이 나 보였다. 그는 두 기자가 살인사건과 관련해서 자신을 찾아왔다는 사실을 즐기는 눈치였다.
“앉으시죠! 뭘 갖다 달라고 할까요? 커피? 아니면 차?”
“커피 좋죠.”
노아도 넉살좋게 웃으며 대답하고는 재훈이 권유하는데로 접객용 소파에 앉았다. 정민은 노아의 옆에 조금 떨어져서 앉았다. 재훈의 취향을 그대로 반영한, 크고 화려한 소파였다. 상석에는 재훈이 앉았는데 그는 마치 왕처럼 거드름을 피고 있었다. 정민은 재훈이 입고 있는 정장과 구두를 눈대중으로 한 번 확인했다. 화랑관의 파티 때와 마찬가지로 최고급 명품들을 걸치고 있었다. 정민은 사장실 곳곳에 걸려 있는 크고 작은 그림들도 확인했다. 하나 같이 국내외 유명 화가들의 작품들로 정민이 알기로 이중 몇 점은 가격이 수억 원대에 달했다. 작품들 역시 재훈의 취향을 그대로 반영해 하나 같이 화려하고 웅장한 느낌이었다.
정민의 눈에 순간 이채가 스치고 지나갔다. 재훈이 자랑스럽게 걸어놓은 작품들 중 몇 점은 다름 아닌 하윤의 작품이었다. 하긴. 어쩌면 두 사람은 성격상 공통점이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둘 다 자기 잘난 맛에 사는 면이 있으니 말이다. 차이점이라면 하윤은 그걸 사람들 앞에 숨겨왔다는 것, 그리고 재훈은 반대로 그 사실을 사람들 앞에 뽐내지 못해 안달이라는 것.
재훈의 비서가 세 잔의 아이스 커피를 내왔다. 별 생각 없이 한 모금 들이킨 정민은 조금 놀랐다. 커피의 맛을 딱히 가리지 않는 정민이었지만, 그런 정민도 단번에 알아차릴 수밖에 없을 만큼 향이 깊었다. 만약 살인 사건에 관련된 취재를 하러 온 게 아니었다면, 어떤 에스프레소 머신과 원두를 쓰는지 물어보고 싶을 정도였다.
“나는 노아 기자님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걸 진작 알고 있었습니다.”
재훈은 기자에게 있어서는 좋은 인터뷰 상대였다. 좋다 못해 조금 짜증이 날 정도로 말이 많았다. 그리고 모든 이야기가 결국 본인에 대한 내용으로 귀결된다는 사실도 정민의 인내심을 시험했다. 다행히 노아는 정민이 아는 그 누구보다도 인내심이 많았고, 또 누구보다도 쓸데 없는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사람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노아와 재훈은 궁합이 아주 좋았다.
“예능해서 봤을 때도 다른 출연자들과는 추리력이 다르다고 생각했죠. 단순 쇼가 아니라 실제 사건을 파헤쳐봤을 것 같은 전문성이 보였다고 할까? 이번 사건도 이렇게 노아 기자님이 직접 나선다고 하니 든든합니다. 물론 제가 대한민국 경찰을 못믿는다는 말은 아니지만, 왠지 기자님은 더 신뢰감이 들거든요. 마치 소설속의 명탐정처럼 말이죠.”
“과찬이십니다.”
노아가 부끄럽다는 듯 고개를 살짝 숙여보였다.
“제가 하는 일은 경찰 수사를 보조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실 제가 지금부터 할 질문들도, 아마 경찰에게서 사장님이 이미 다 들으신 질문들일 겁니다.”
“아니, 그럼 경찰도 공식적으로 기자님과 협력하고 있는 겁니까?”
재훈이 깜짝 놀라는 시늉을 했다.
“경찰들과 함께 수사한다니! 그거야 말로 기자님의 위상을 증명하는 일 아닙니까?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대단하신 분이시군요.”
재훈은 호들갑을 떨며 노아 띄워주기에 여념이 없었다. 재훈 특유의 화법으로 정민 역시 익숙했다. 재훈은 누구와 대화하든지간에 상대를 과도하게 띄워주는 성향이 있었기에 그가 하는 말의 절반 이상은 그냥 흘려듣는 편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