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아도 아마 재훈의 의미없는 칭찬세례를 모르진 않을 터였다. 하지만 노아는 웃음을 잃지 않고 재훈의 말 하나 하나에 다 반응해주었다. 이에 신이 난 것인지 재훈은 한동안 또 의미없는 말들을 늘어놓으며 시간을 허비했다. 정민은 몇 번이고 그만 입 좀 다물라고 타박을 주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니라 무진 애를 써야했다.
“죄송합니다. 너무 제 얘기만 했군요.”
끝이 없을 것 같던 재훈의 수다가 겨우 끝났다. 충분히 떠든 것인지 매우 만족스러운 얼굴로 재훈이 노아에게 물었다.
“바쁘실 텐데 더 이상 두 분의 시간을 뺏을 수 없죠. 슬슬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자, 제게 뭘 물어보려 오셨습니까, 노아 기자님?”
“여러가지가 있지만, 일단 이것으로 시작하겠습니다.”
노아는 전혀 서두르지 않고 느긋하게 말문을 열었다.
“피해자와는 잘 아는 관계셨나요?”
“잘 아는 사이였냐구요? 강도훈 작가와?”
재훈이 쓴웃음을 머금고 되물었다. 무어라 형언하기 어려운 감정들이 섞여 있는 표정이었다.
“이런 식으로 말하면 제게 불리한 거겠죠?”
깊게 숨을 한 번 내쉬면서 재훈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저야 뭐 꺼릴 게 없으니…… 경찰들에게도 다 사실대로 털어놓았구요. 강도훈 작가…… 고인이 됐으니 함부로 말하면 안 되겠죠. 사실 전 강도훈 작가와 잘 아는 사이는 아닙니다. 사적으로 친분이 있을 일이 없었죠.”
말을 하다 멈추고 재훈이 인상을 찌푸렸다. 다시 떠오르기도 싫다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좋은 관계는 절대 아니었습니다. 아니, 전 솔직히 말하면 강도훈 작가를 아주 싫어했습니다.”
“그래요?”
흥미롭다는 듯 노아가 되물었다.
“이유가 있으신가요?”
“있죠. 아주 명확한 이유가.”
재훈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예전에 강도훈 작가와 크게 부딪힌 적이 있습니다. 한 2년 전쯤? 원래 그 양반 화풍이 제 스타일이 아니라 평소 관심이 없었어요. 그런데 그 당시에 강도훈 작가가 새로 그렸다는 작품 몇 점이 제 흥미를 끌었습니다. 뭐, 언제나 그렇듯이 칙칙하긴 했지만 뭔가 장엄한 느낌이 있어서 맘에 들었어요. 그래서 그 작품들을 사고 싶다고 문의를 했죠. 그 양반 전시회까지 찾아가서 직접 만나서 얘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거절 당했습니다.”
“거절 당해요?”
노아는 조금 놀란 것 같았다.
“이유가 뭐였나요?”
“얼토당토 않는 이유였습니다.”
재훈이 이를 갈았다.
“나 같이 예술을 알아보는 안목이 없는 졸부에게는 팔 수 없다…… 간단하게 줄이자면 그런 거였어요. 어이가 없었죠. 화도 났구요. 저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졌습니다. 그러자 그쪽도 지지 않고 언성을 높이더군요. 고성…… 욕설도 오갔습니다. 그 이후 전 강도훈 작가 작품이라면 쳐다도 보지 않았습니다. 그 양반이랑은 아예 엮이지 않으려고 했죠.”
“그렇군요.”
이해한다는 듯 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그제 화랑관의 파티에 피해자가 초대받았다는 사실도 모르셨겠군요?”
“알았으면 아마 안 갔을 겁니다.”
재훈이 코웃음을 쳤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마주치지도 않았구요. 그 양반한테는 불행한 일이었지만요. 차라리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었다면 그런 꼴은 안 당했을 테니…….”
그렇게 말하고 있었지만 재훈은 눈꼽만큼도 도훈을 동정하는 투는 아니었다. 노아가 질문을 이어갔다.
“그때 파티에 피해자에게 원한을 가질 만한 사람들이 많았나요?”
“많았을 걸요?”
재훈이 어깨를 으쓱했다.
“저 같은 꼴을 당한 미술애호가들이 한 둘이 아닙니다. 강도훈 작가의 그 지랄 맞은 성격에 봉변 당한 사람들이 제 지인들 중에도 여럿 있습니다. 심지어 화랑관 직원도 당했다고 들었는데요. 직접 당한 게 아니더라도 그 양반 좋아하는 미술계 관계자는 아마 없을 겁니다. 소문이 워낙 안 좋아서요.”
세민도 같은 말을 했었지. 정민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역시 도훈에게 당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재훈의 기분을 십분공감할 수 있었다. 하윤은 도훈의 그런 무례함과 공격성 역시 스스로에게 예술적 영감을 불어넣기 위해 일부러 하는 행동이라고 했지만 도훈에게 직접 당한 경험이 있는 정민 입장에서는 그 말을 다 믿기 힘들었다. 정민의 기억 속 도훈은 천재 화가가 아니었다면 상종하기조차 싫은 부류의 인간이었을 뿐이었다.
“저도 피해자가 인간관계가 좋지 못했다는 이야기들은 여기저기서 들었습니다.”
노아가 맞장구를 쳤다.
“다만 그 정도 원한은 살해 동기로 보기 어렵지 않을까요? 물론 어떤 분들에게는 피해자에게 당한 모욕이 더 크게 와닿았을 수도 있지만…… 피해자에게 보다 큰 원한을 가질만한 사람들이 있을까요?”
“글쎄요.”
재훈이 조금 곤란해보이는 표정을 지었다.
“앞서 말했듯이 제가 강도훈 작가랑 사적으로 친분이 있던 건 아니어서…… 저도 자세히 아는 것은 없습니다. 그저 소문으로 이런저런 얘기들을 들은 것밖에는…….”
재훈의 마지막 말은 꽤나 의미심장했다. 은근히 흘리면서 노아가 자신이 물은 소문들에 대해 물어봐주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한편 정민은 노아가 한 말을 곱씹고 있었다.
‘물론 어떤 분들에게는 피해자에게 당한 모욕이 더 크게 와닿았을 수도 있지만.’
정민은 재훈을 다시 보았다. 선이 굵은 잘생긴 얼굴. 하지만 치켜올라간 눈썹과 날카로운 눈매가 그도 보통 성격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었다. 젊은 나이에 사업적으로도 이미 큰 성공을 거뒀고 자기애도 무척 강하다. 게다가 사람들의 관심과 주목을 대놓고 즐기는 타입이다. 미술이란 취미도 진심으로 미술을 사랑한다기 보다는 자기과시용 목적이 강할 것이라고 정민은 생각했다. 아마 정민 외에도 대다수 미술계 관계자들은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렇게 보면 도훈은 다른 사람들은 속으로 생각만 한 것을 입 밖으로 낸 것뿐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런 도훈의 언사가 재훈의 자존심에 큰 생채기를 내진 않았을까.
그리고 재훈은 그런 도훈을 결국 용서하지 못한 건 아닐까. 그런 눈으로 보니 갑자기 재훈의 큰 키와 건장한 체격도 눈에 들어왔다. 도훈을 살해한 범인의 조건에 재훈도 충분히 부합하지 않은가? 도훈의 사망추정시간 동안 재훈은 어디서 뭘 하고 있었더라……?
“형식적이긴 하지만, 사장님 알리바이도 한 번 확인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재훈의 기대와는 달리 노아는 재훈이 들은 소문들에 대해 묻지 않고 넘어가버렸다. 재훈은 아쉬움을 감추지 않고 입맛을 다셨다. 알리바이라는 단어가 언급됐음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태도였다. 아마 자신이 있다는 뜻이리라.
“그제 사장님이 자리를 뜨셨던 게 대충 8시쯤으로 기억합니다.”
“비슷할 겁니다.”
재훈이 대답했다.
“저도 그때쯤 전화가 온 것으로 기억합니다.”
“업무상 전화였나요?”
“맞습니다.”
재훈이 살짝 혀를 찼다.
“미국에 있던 클라이언트에게 전화가 온 겁니다. 뭔가 대단한 일인양 떠들길래 저도 심각한 사안인 줄 알았습니다. 통화가 길어질 것 같아서 먼저 일어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통화를 하러 어디로 가셨나요?”
“옆에 라운지에 있는 방 중 하나로 갔습니다.”
재훈이 술술 대답했다.
“애초에 거기 방들이 그런 용도로 준비된 것으로 압니다. 방문객들이 방해받고 싶지 않은 일들이 생겼을 때 사용할 수 있게 말입니다.”
“거기서 얼마나 계셨나요?”
“파티 끝나고도 한동안 계속 있었습니다. 일하느라 파티가 끝난 것도 나중에야 알았어요.”
재훈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보였다.
“대단찮은 일인데 어쨌든 클라이언트가 클레임을 걸어왔으니…… 덕분에 저희 직원들이 야근을 해야했죠. 회사에 연락해 이것저것 알아보라 지시하고, 다시 클라이언트와 통화하고…… 그래도 다행히 화랑관을 떠나기 전까지는 다 마무리됐습니다.”
알리바이에 자신이 있었을만 하네. 정민은 속으로 감탄했다. 재훈의 말을 그대로 다 믿는다면 재훈은 도훈의 사망추정시간 동안 내내 동관 1층에만 있었다. 그리고 클라이언트나 회사 직원들과 계속 통화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통화기록도 다 남아있을 것이고 확인해줄 사람들도 넘쳐난다. 동기는 몰라도 알리바이는 거의 완벽한 듯했다.
“화랑관을 몇시에 떠났는지도 기억하시나요?”
“대략 9시 30분? 대리기사가 좀 늦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알겠습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노아가 잠시 뜸을 들였다. 그러더니 기습적으로 물었다.
“혹시 라운지의 방들을 사용하는 다른 파티 참석자들은 못보셨나요?”
“다른 참석자요?”
“라운지의 방들을 사장님 외에도 몇 분이 사용했다고 들었습니다. 혹시 다른 분들이 방을 쓰는 걸 보시진 못했나요?”
“못봤습니다.”
재훈이 즉답했다.
“다른 사람들이 누가 사용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누군가 다른 방들을 사용하고 있다는 건 알았습니다. 제가 갔을 때는 이미 방 두 개가 문이 닫혀있었거든요.”
“그래요?”
노아가 신기하다는 듯 되물었다.
“그 방들은 사용자가 없을 경우에는 문을 닫아놓지 않는 건가요?”
“노아 기자님은 동관 라운지 방들을 사용하신 적이 없으시군요.”
재훈이 가볍게 웃었다.
“예. 사용자가 없는 경우에는, 방들의 문을 아주 살짝 열어놓습니다. 비어있으니 사용가능하다는 의미죠. 반면 사람이 있을 경우에는 문이 닫혀있습니다. 그 방들을 사용해본 사람들이라면 다 알고 있는 상식 같은 겁니다.”
“하지만 모르는 사람이 무심코 들어갈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럴 수도 있겠죠.”
재훈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있을 수 있는 일이죠. 하지만 가능성은 낮습니다. 애초에 동관 1층 라운지는 파티나 큰 이벤트가 열릴 때나 사용되는 공간이라 일반 관람객들이 방문할 일이 많이 없고…… 이벤트가 있을 때는 화랑관 직원들이 안내를 해주니까요. 그리고 그제 파티는 참석자 중 태반이 화랑관 단골들이라 아마 이 방들을 사용하는 법에 대해 모르는 사람은 없었을 겁니다.”
“저를 제외하고는 말이죠.”
노아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정민은 의아한 얼굴로 노아를 흘끔 바라보았다. 노아는 왠지 눈을 빛내고 있었다. 하지만 정민은 재훈이 지금까지 말한 이야기 중 특별히 눈을 빛낼 만한 부분이 있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