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쨌든 사장님이 가셨을 때는 이미 라운지 방문 두 개가 닫혀있었다는 거죠?”
“네. 확실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재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전 안에 들어간 이후로 파티가 끝날 때까지 전혀 나오질 않아서 그 이후 다른 사용자들이 또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여전히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은 채 노아가 말을 이었다.
“제가 오늘 동관 라운지를 돌면서 그 방들을 보기는 했는데 특별히 기억에 남는 건 없네요. 아무래도 다시 한 번 화랑관에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열심이시군요.”
재훈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노아 기자님이 이렇게 열심히 수사를 돕고 계시니 아주 든든합니다. 살인범을 잡을 날이 멀지 않은 것 같군요. 하하.”
“그렇지도 않습니다.”
노아도 같이 웃었다.
“사실 아직 감도 잡지 못한 상황입니다. 범인이 어떻게 피해자를 살해할 수 있었는지, 그리고 그 동기가 과연 무엇일지 말입니다.”
“흐음. 동기라…….”
재훈도 새삼 진지한 척 폼을 잡았다. 하지만 정민은 순간 재훈의 눈빛이 번뜩이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재훈은 노아와의 대화를 즐기는 것 같았다. 어쩌면 머릿속에서 본인만의 추리를 한창 펼치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그러고 보니 제가 묘한 소문을 듣기는 했는데.”
“소문이라면 어떤……?”
“아. 크게 신빙성 있는 소문은 아닙니다. 저도 지나가듯 들은 이야기고 당시에는 뜬소문이라고 치부했었거든요. 정민 기자님은 잘 아시겠지만 미술계가 꽤 좁습니다. 소문이란 게 금방 퍼지기도 하고, 또 나중에 알고보면 그런 소문들이 대부분 사실인 경우가 많아요. 하지만 제가 들은 이야기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저도 근거없는 소문이라고만 생각하고 잊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니…….”
“상황이라고 하시면?”
“어쨌든 도훈 작가가 화랑관에서 살해당하지 않았습니까?”
재훈이 고개를 한 번 으쓱했다.
“그날 도훈 작가가 파티 참석은 안 하고 화랑관 관장님과 따로 미팅을 했다고 하던데…….”
“네. 맞습니다. 그랬었다고 하더군요.”
노아가 별 거 아니라는 듯 그렇게 대답했다. 하지만 정민은 살짝 멈칫했다. 도훈과 김준호 관장 간의 미팅은 나름 비밀스러운 회동 아니었나? 이렇게 아무 상관 없는 제3자인 재훈에게 이야기해줘도 괜찮은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오. 제가 들은 게 사실이었군요.”
이제 재훈은 흥미를 숨기지도 않았다. 그는 확실히 들떠 있었다. 도훈의 죽음은 재훈에게 있어 그저 재미있는 수수께끼 같은 유흥거리에 지나지 않는 듯했다.
“사실 이런 소문을 들었거든요. 도훈 작가가 화랑관을 협박하고 있다는…….”
“그래요?”
생전 처음 듣는 소리라는 듯 노아가 두 눈까지 동그랗게 뜨고 놀라는 리액션을 취해보였다. 이는 재훈을 한층 더 신나게 만들었다.
“예. 하지만 그때는 그냥 흘러들었습니다. 도훈 작가가 아무리 실력으로 인정 받는 화가라고 해도 화랑관 같이 한국에서 손꼽히는 명문 미술관에 싸움을 걸 위치는 아니었으니까요. 하지만 결국 도훈 작가가 화랑관에서 비밀스러운 미팅 후 살해당한 것을 보면…… 이 소문이 전혀 근거 없는 헛소문만은 아니었던 게 아닐까요?”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 같습니다.”
노아가 맞장구를 쳤다.
“그럼 혹시 피해자가 무엇으로 화랑관을 협박하는지도 들으셨나요?”
“안타깝게도 그건 듣지 못했습니다.”
재훈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러나 그의 두 눈은 여전히 반짝이고 있었다. 정민은 재훈이 뭔가 다 털어놓고 있지 않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끼어들어야 하나? 정민은 잠시 고민했다. 재훈의 성향을 고려할 때 옆에서 살살 부추기면 아는 것을 숨김 없이 다 떠들지도 몰랐다. 어쩌면 노아와 정민이 자신의 옆구리를 쿡쿡 찔러주기만을 지금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랐다.
“아쉽네요.”
그러나 노아는 더 이상 파고들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말하면서 슬쩍 정민을 쳐다보는 것이 가만히 있으라는 제스처 같았다. 정민은 바로 눈치 채고 나서지 않았다.
“만약 협박의 내용까지 알았다면 큰 도움이 됐을지도 모르는데 말입니다. 어쩌면 진범의 동기에 근접했을 수도 있지요.”
“기자님은 도훈 작가가 화랑관을 협박한 것이 범인과 관계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시는군요?”
“아무래도 그렇지 않을까요? 사장님 말처럼 피해자가 화랑관에서 죽은 걸 우연이라고만 보기는 석연찮으니까요.”
그렇게 말하는 노아의 태도는 슬슬 대화를 마무리하려는 사람의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재훈으로부터 들을 것은 다 들었다는 듯이 말이다. 흐음. 재훈은 오른손으로 본인의 턱끝을 어루만지며 살짝 다리를 꼬았다. 노아가 더 캐묻지 않은 것에 실망하는 듯한 눈치는 없었다. 그저 전보다 더 재미있다는 듯 노아를 보고 있었다. 노아는 그런 재훈의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것처럼 시치미를 뚝 뗐다.
“사장님이 들으신 소문을 경찰에게도 알리셨습니까?”
“아뇨. 그때는 경황이 없어서 기억을 못했습니다. 방금 기자님께 처음 말씀드린 겁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제가 사장님을 대신해 경찰에게 이 사실을 알려도 될까요? 경찰에게 추가적으로 연락이 올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만.”
“물론입니다. 수사라면 얼마든지 협조할 의향이 있으니 그런 점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재훈이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협조적인 건 다행이었지만, 역시 전혀 살인사건에 임하는 사람의 자세가 아니라고 정민은 속으로 생각했다. 세 사람은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재훈은 회사 밖까지 노아와 정민을 직접 배웅했다. 재훈은 시종일관 두 사람에게 친절했고, 특히 노아에게 큰 호감과 호의를 보였다. 노아도 계속해서 재훈에게 감사를 표하며 재훈의 비위를 맞췄다. 아마 이 때문에 재훈이 노아를 특히 더 마음에 들어하는 것일 것이다. 같이 동석한 정민은 미팅 중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니까.
시간이 늦었으므로 노아가 정민을 집까지 데려다주겠다고 제의했고 정민은 거절하지 않았다. 사실 정민은 노아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이재훈 사장, 뭔가 더 알고 있는 것 같지 않았어?”
자신도 눈치 챈 것을 노아가 눈치 못 챘을 리 없으므로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아아. 노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알고 있었다.
“협박 내용은 모른다고 했죠. 거짓말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그러면?”
“말그대로 소문의 내용이 구체적이지 않았던 거겠죠. 협박 내용까지 흘러나가지는 않은 정도……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해야겠죠. 아마 이재훈 사장이 뭔가 개인적으로 아는 것이 있다고…….”
“아는 것? 어떤 거?”
“글쎄요.”
노아가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전혀 모르겠다는듯 멋쩍은 웃음까지 지어보였다.
“피해자에 대해 알고 있거나? 아니면 화랑관에 대해? 어쩌면 둘 다 일 수도 있구요. 그렇지만 이재훈 사장은 피해자와 굉장히 관계가 안좋았던 것 같으니 아마 화랑관에 대해 뭔가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요?”
“그 말인즉슨 이재훈 사장이 협박당할만한 화랑관의 약점에 대해 뭔가 알고 있다는 거야?”
그럴 수 있죠. 노아가 짧게 대답했다. 정민은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문화부 기자였고 한국미술계에 정통했다. 화랑관도 여러번 방문했고 그 역사에 대해서도 매우 잘 알고 있다고 자부했다. 그러나 화랑관의 약점이나 비밀 같은 것은 들어본 기억조차 없었다. 세명 그룹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었다. 그들의 관리 하에 화랑관은 대한민국 최고의 미술관 중 하나로 자리잡았고 그 오랜 기간 동안 흠결 하나 없이 명성을 유지해왔다. 살인사건이라는 불명예스러운 일에 휘말리기 전까지 말이다.
“그런데 이재훈 사장이랑 왜 더 얘기하지 않았어? 그 사람, 조금만 더 캐물으면 다 얘기할 기세였는데.”
“그랬겠죠 아마?”
노아가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그런데 그냥 더 묻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아마 본인이 얘기하고 싶어서 못견디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럼 왠지 더 많이 털어놓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말이죠.”
“.......”
그것도 일리는 있군. 정민은 생각했다. 조금 궁금하기는 했다. 대체 재훈이 화랑관에 대해 뭘 알고 있는지. 하지만 솔직히 그리 대단한 정보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화랑관의 비밀에 대해서는 재훈보다 김준호 관장과 정훈에게 듣는 편이 빠르지 않을까.
노아는 다음날 다시 화랑관으로 가겠다고 했다. 정민은 아쉽지만 해야 할 일이 있었으므로 내일은 출근을 해야했다. 대신 노아는 뭔가 새롭게 알아내는 것이 있으면 정민에게 알리겠다고 약속했다.
정민을 집 앞에 내려다주고 노아는 바로 떠났다. 멀어져가는 차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정민은 스스로에게 조금 놀랐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노아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알 수 없는 거부반응이 몸에서 일어났는데, 오늘은 하루 종일 같이 있으면서 노아를 딱히 의식하지 않는 순간들이 더 많았다. 그 짧은 사이 벌써 노아에게 다시 익숙해져버린 것일까.
‘미안해.’
순간 현기증이 들었다.
정민은 비틀비틀 집으로 들어갔다. 잊고 싶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잊을 수 없는 목소리기도 했다. 그 목소리가 귓가에 생생히 울려퍼지는 느낌이었다. 그래. 너무나도 오랜만에. 마치 어제 들은 것처럼 생생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