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관의 비밀 (5)

by 온실라

그로부터 며칠이 흘렀다.


노아로부터 별 다른 연락은 없었다. 아마 계속 조사하고 있겠지만 크게 성과가 없는 걸지도 몰랐다. 정민은 정민대로 본업 때문에 바빠서 화랑관에 대해 신경쓸 여유가 없었다. 간간히 생각나기는 했지만, 노아에게 먼저 연락하는 것이 뭔가 망설여졌기 때문에 그냥 가만히 있었다. 문득 이렇게 시간이 흘러 전부 다 유야무야 끝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살인사건에 대한 수사도, 노아와 자신의 관계도.


그런 상념에 빠져있을 때, 느닷없이 노아로부터 연락이 왔다.


토요일 오후에 김준호 관장과 다시 약속이 잡혔는데, 혹시 같이 갈 생각이 있냐는 것이었다. 정민은 일말의 고민도 없이 가겠다고 대답했다. 스스로도 조금 놀랐다. 그녀는 의식하고 있는 것 이상으로 이번 사건에 대해 크게 신경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토요일 아침. 노아가 정민의 집 앞으로 정민을 픽업하기 위해 왔다. 늘 그렇듯 웃는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정민은 평소보다 노아가 조금 더 들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사건 관련하여 뭔가 진전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


“무슨 일 있었어?”


많은 물음이 함축된 질문이었다. 노아는 즉답했다.


“많은 일들이 있었죠.”


노아의 목소리도 꽤나 들떠 있었다. 마치 소풍가는 어린아이처럼 신이 난 것 같았다.


“어디부터 얘기해야 할까요? 아, 일단 선배랑 헤어지고 다음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부터 설명해드릴게요.”


그날 오전과 오후는 화랑관에서 보냈다. 정민에게 미리 말했던 것처럼 노아가 다시 화랑관을 찾은 것이다. 그날은 딱히 누군가를 다시 만나기 위해 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화랑관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시간을 보냈다. 노아는 여전히 방법을 찾고 있었다. 수수께끼의 살인자가 CCTV에 찍히지 않고 강도훈을 살해한 방법을.


“그런데 예상 외의 사람에게서 연락이 왔어요. 혹시 저녁에 볼 수 있냐고 말이죠. 같이 식사나 하자고 하더군요.”


“그게 누구였는데?”


재훈이었다.


노아의 생각이 옳았다. 재훈은 분명 노아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다. 그런데 노아가 별 다른 관심이 없는 척을 하자 하루도 기다리지 못하고 결국 본인이 먼저 다시 연락을 한 것이다.


노아는 못이기는 척 재훈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두 사람은 서울의 한 고급 횟집에서 만났다. 재훈의 회사 근처였는데, 재훈이 좋아하는 숨겨진 맛집이라고 했다. 맛집인 것 치고는 손님이 많진 않았다. 하지만 사람이 적어서 오히려 사적인 얘기를 나누기는 좋을 것 같았다. 재훈도 그걸 염두에 두고 이 식당을 고른 걸지도 몰랐다.


처음에는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시시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으로 시작했다. 재훈은 술도 시켰는데, 노아가 본인 돈으로는 사먹을 엄두도 못낼 수준의 고급 사케였다. 하지만 노아는 일하는 중이라는 이유로 거절했다. 대신 재훈이 혼자 술잔을 기울이는 것까진 말리지 않았다. 오히려 좋았다. 본래 술이 들어가면 할 생각이 없던 얘기까지 무심코 털어놓게 되는 법이니까.


노아와 재훈 두 사람 다 식사 중에는 사건에 대해 딱히 언급하지 않았다. 식사가 대충 마무리 되고 재훈의 얼굴에 슬슬 취기가 올라온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노아는 재훈이 먼저 자신의 패를 꺼내기를 끈질기게 기다렸다. 대화의 주도권을 조금이라도 노아 쪽이 쥐기 위해선, 노아가 재훈에게 간청하듯 말을 끌어내선 안 됐다. 재훈이 못참고 알아서 털어놓는 쪽이 좋았다.


“난 이상하게 노아 기자님이 참 좋아요.”


재훈이 언제쯤 본론을 꺼낼지 노아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을 때, 재훈이 뜬금없이 이렇게 말했다.


“노아 기자님이랑 이야기 하고 있으면 말이 정말 잘 통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거든. 기자님도 그런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TV에서 기자님을 본 적이 있어서 그런가, 난 이상하게 기자님을 처음 봤을 때부터 내적 친밀감 같은 게 느껴지더라구.”


“저도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노아가 맞장구를 쳤다.


“물론 사장님이 워낙 제 이야기를 잘 들어주셔서 그런 거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조금 놀랐습니다. 사회적으로 굉장히 크게 성공을 거두셨는데도 워낙 소탈하셔서요. 꼭 오래 본 형님 같은 친근감이 느껴지더군요.”


“기자님이 그렇게 느끼셨다니 다행입니다.”


흡족하다는 듯 재훈이 호탕하게 웃으며 잔을 비웠다. 노아는 재빨리 다시 잔을 채워줬다. 재훈은 기분이 매우 좋아보였다.


“그럼 말이 나온 김에, 우리 말을 놓는 게 어떻습니까? 난 개인적으로 기자님과 진짜로 형님 동생하는 사이가 되면 좋을 것 같은데.”


“사장님이 연장자시니 말을 놓는 건 당연하죠. 편하게 하십시오.”


“그럼 지금부터 말 좀 편하게 할게.”


재훈이 껄껄 웃었다.


“노아 동생도 말 편하게 해. 나 그런데 까탈스러운 사람 아니니까.”


“아유. 아닙니다. 전 존대가 편합니다. 그래도 저도 지금부터는 형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형님! 형님 좋지! 형님 소리 참 듣기 좋네. 안 그래도 내 주위에 노아 동생 같이 싹싹한 동생들이 별로 없단 말이지. 대부분 다 나보다 한참 위인 어르신들 뿐이야.”


어지간히 신났는지 재훈은 계속해서 웃음을 터뜨리며 이런저런 말들을 떠들어댔다. 노아도 웃으며 재훈의 비위를 잘 맞춰줬다. 재훈에게 친근감을 느낀다는 노아의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재훈 같이 허세가 있고 관심 받는 걸 즐기는 타입의 사람은 노아에게 있어 가장 상대하기 편한 류에 속했다. 하루 종일이라도 상대해줄 자신이 있었다.


그렇게 또 서로 칭찬을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자니, 드디어 재훈이 노아를 부른 이유를 털어놓았다.


“노아 동생이랑 친해졌으니까 하는 말인데…….”


돌연 웃음기가 싹 가신 얼굴로 목소리를 낮추고 재훈이 말했다. 노아 역시 살짝 자세를 낮추고 귀를 기울였다. 온몸으로 경청할 준비가 됐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사실 그때 회사에서는 다 못한 얘기가 있었어.”


“그랬습니까?”


상상도 못했다는 듯 순진한 얼굴로 노아가 되물었다.


“그럼 이번 사건과 관련해 형님이 혹시 더 아시는 게 있으신 건가요?”


“그건 잘 모르겠어.”


무게를 잡으며 재훈이 고개를 저었다.


“이번 사건과 관계가 있는지는 모르겠어. 하지만 도훈 작가가 화랑관을 협박했었다고 했잖아?”


“그랬죠.”


“그렇다는 건 도훈 작가가 화랑관의 어떤 약점을 알고 있다는 소리잖아?”


“그렇죠.”


“바로 그거야.”


취기 때문인지, 아니면 일부러 그러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재훈이 별다른 부가 설명없이 힘주어 말했다. 지금까지 자신이 한 말만 가지고는 어떤 결론을 내기 힘들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것 같았다.


“화랑관의 약점. 도훈 작가가 화랑관의 약점에 대해 알고 있는 거야. 그렇게 밖에 생각할 수 없지.”


“하지만 형님도 그때 협박 내용은 모르신다고…….”


“몰라. 나야 정확한 내막은 모르지. 하지만 짚이는 게 있어.”


“예?”


노아는 깜짝 놀란 척을 했다. 실수라는 듯 목소리를 높이고 주위를 한 번 둘러보기까지 했다. 그런 노아의 반응은 재훈을 더욱 흡족하게 만들었다.


“그말은 형님도 화랑관의 약점을…….”


“안다고 해야하나?”


미묘한 투로 재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것도 백프로 확실한 건 아니야. 소문이야. 꽤 그럴듯한 소문이지. 아주 오래 전 이야기지만, 확실히 화랑관의 약점이 될만한 소문이지. 그래서 도훈 작가가 화랑관을 협박했다고 했을 때 나도 모르게 내가 들었던 이 소문을 떠올린 거야. 혹시 도훈 작가도 같은 소문을 접한 게 아닌가 하고 말이야…….”


“그게 무슨 소문인데?”


노아의 말을 귀기울여 듣고 있던 정민이 결국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노아와 재훈이 호형호제하기로 했다는 것까지도 꾹 참고 들었지만, 재훈이 화랑관의 약점을 운운하고 나서자 도무지 끼어들지 않을 수 없었다.


적어도 정민이 알기로는 화랑관에 약점이라고 할 만한 것은 없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문화부 기자인 정민이 커리어를 걸고 장담할 수 있는 일이었다. 물론 작은 사건사고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미술관 전체의 약점이라고 할 만한 치명적인 스캔들이나 비리는 없었다. 그런 게 드러난 적이 있었다면 재훈보다 정민이 먼저 알았을 것이다. 도훈이 무엇을 근거로 화랑관을 협박할 수 있었는지가 이런 큰 수수께끼가 되지도 않았을 것이고.


“저도 궁금하더라구요. 그래서 재훈 형님에게 물었죠.”


노아와 재훈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형 동생 하는 관계를 유지할 모양이었다. 재훈 같은 사람과 진지하게 계속 가깝게 지낼 심산이냐고 묻고 싶은 마음을 정민은 일단 꾹 참아야했다.


“그래서 이재훈 사장이 뭐래?”


“사실 전 들어도 이게 그렇게 굉장한 건지는 잘 모르겠더라구요. 그래서 선배한테 한 번 확인해보고 싶었어요.”


“생각보다 대단한 건 아닐 수도 있지.”


재훈은 꽤나 실없는 사람이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정민이 말을 이었다.


“그래서 그 화랑관의 약점이란 게 대체 뭐야?”


“고 윤창섭 사장에 대한 거였어요. 이분이 화랑관 창립자라고 했죠?”


“뭐?”


정민은 자신도 모르게 한쪽 눈썹을 찡그렸다.


“윤창섭 사장에 관한 거라고?”


“예. 그분 대표작…… 유일한 수상작이라고 하던데? 새벽 뭐라고…….”


“새벽의 정적.”


정민은 침착하게 노아의 말을 정정해주었다. 하지만 목소리가 묘하게 떨리고 있었다. 갑자기 가슴팍이 답답해진 느낌이었다. 노아의 말을 다 듣지 않았지만, 어떤 내용일지 왠지 다 알 것 같았다.


“말 그대로 윤창섭 사장의 대표작이야. 국내 미술대전에서 유일하게 수상을 한 작품이기도 하고.”


“맞아요. 재훈 형님도 그렇게 얘기했죠.”


정민의 변화를 감지못했다는 듯 노아가 천연덕스럽게 말을 계속했다.


“그런 소문이 있었다고 하더라구요? 윤창섭 사장의 수상 관련해서 당시 안 좋은 소문들이 좀 있었다고. 상을 받은 작품이 윤창섭 사장의 작품이 아니라던지…… 세명그룹에서 심사위원들을 매수했다느니…… 그런 소문들이 있었다고.”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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