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아와 정민은 11시가 되기 전 화랑관에 도착했다. 토요일임에도 불구하고 화랑관은 매우 한산한 분위기였다. 조사를 마친 경찰이 철수를 하긴 했지만 화랑관은 아직 개관을 미루는 중이었는데, 살인사건의 현장이 돼버린 불명예를 여전히 신경 쓰고 있는 듯했다. 애꿎은 주환만 피해를 보고 있는 상황인지라 정민은 내심 안타까웠다. 하지만 사건의 중대성을 고려하면 개관을 최대한 미루는 화랑관의 선택이 옳을지도 몰랐다.
두 사람은 화랑관 본관이 아닌 이번에 새롭게 지어진 건물, 윤창섭 사장 기념관에 들어와 있었다.
대중에는 아직 공개 전인 건물이었지만 노아가 김준호 관장에게 특별히 허락을 받았다고 했다. 노아는 뭔가 들떠서 기념관을 둘러보고 있었다. 미술에 문외한임에도 불구하고 전시돼 있는 그림들 하나 하나, 설명 하나 하나를 꼼꼼히 살펴보았다. 정민은 그런 노아의 뒤를 따라다니며 대충 눈대중으로 전시된 그림들을 관람했다. 정민의 눈으로 보자면 윤창섭 사장 기념관은 크게 특별한 부분이 없는 평범한 기념관이었다. 입구 벽쪽에 윤창섭 사장의 초상과 그의 일대기가 적혀 있었고, 그의 생애를 볼 수 있는 사진들이 전시돼 있는 공간도 있었다. 사진 중 절반 이상이 윤창섭 사장이 미술계의 유명인사들과 찍은 사진들, 혹은 화랑관에서 찍은 사진들이었다. 전반적으로 그가 화랑관의 창립자라는 사실과 한국 미술계에 끼친 영향을 특히 강조하려고 한다는 인상을 주었다.
기념관 대부분은 그의 작품들을 전시하는데 쓰였는데, 대표작인 새벽의 정적 외에도 대중에 한 번도 공개된 적 없는 그림들, 심지어 간단한 스케치들까지 전시돼 있었다. 화가로서 그가 대단한 업적을 이뤄낸 예술가가 아니라는 걸 생각하면 지나치다고도 할 수 있었지만, 화랑관에서 자기 돈을 들여서 창립자를 기념하는 것이니 제3자인 정민이 뭐라 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어쨌든 윤창섭 사장과 화랑관을 통해 수많은 화가들이 후원을 받은 것은 사실이었다. 그것만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윤창섭 사장의 공이었다.
정민은 차 안에서 노아가 해준 말들을 다시 떠올렸다.
윤창섭 사장에 대한 안 좋은 소문. 정민은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민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놀라기는 커녕 아아 그렇구나, 라고 납득했다. 그렇다고 해도 이상할 게 전혀 없다고 느꼈다. 그만큼 정민은 화가로서의 윤창섭 사장을 높이 평가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마 정민 뿐 아니라 미술계 관계자라면 대부분 비슷한 반응을 보일 것이다.
하지만 화랑관, 나아가 세명 그룹에겐 그렇지 않겠지.
만약 윤창섭 사장에 대한 소문이 사실이라면 예술가로서의 윤창섭은 사실상 끝장이다. 고인의 명예를 크게 더럽히는 일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후폭풍은 윤창섭 사장의 분신과도 같은 화랑관에서 감당해야겠지. 기다렸다는 듯이 물어뜯는 자들도 있을 것이고, 침묵으로 동조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한가지 확실한 건, 세명 그룹 입장에서는 그런 모욕을 당해가면서까지 한국 미술계에 계속 발붙이고 있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결국 모두가 피해를 보는 상황으로까지 번질 수 있는 문제였다.
만약 도훈이 이런 종류의 소문을 접하고 그걸 빌미로 화랑관을 협박했다고 한다면? 그렇다면 김준호 관장이 도훈의 무리한 요구를 뿌리치지 못하고 끌려다닌 것도 어느 정도 설명이 됐다. 윤창섭 사장 관련 스캔들보다 치명적인 화랑관의 약점은 없을 터였다.
정민은 계속해서 차안에서 노아가 들려줬던 이야기들을 곱씹었다.
재훈과의 만남 이후 노아는 또 다른 사람으로부터 개인적인 연락을 받았다. 의외의 인물이었다. 바로 수진의 개인비서인 박준수였다. 준수는 수진이 노아와 만나 이야기를 나누길 원한다고 했고, 노아는 즉시 수락했다. 바로 다음날 오후로 약속이 잡혔다. 장소는 수진의 오피스였다.
수진의 오피스는 서울 중심부에 위치해 있었는데 매우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하얀색의 5층짜리 건물이었다. 주변 다른 건물들과 차별되는 깔끔한 외관으로 미루어보건데 이 건물만 최근에 새로 지어진듯했다. 입구에는 세명문화재단의 간판이 걸려있었고 다른 회사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온전히 세명문화재단의 건물인 것 같았다.
안의 인테리어 역시 건물 외벽만큼이나 희고 깔끔했다. 미모의 여직원 둘이 안내 데스크에 앉아 있었는데 빠르게 노아의 신분을 확인한 후, 그를 5층으로 올려보내주었다. 5층에 도착해 엘리베이터에 내린 노아를 맞이해 준 것은 준수였다. 준수는 큰 키와 유독 작은 얼굴 때문에 마치 모델을 연상케하는 비율을 가진 청년이었는데 안경을 썼기 때문인지, 아니면 유독 딱딱한 표정 때문인지 스마트하면서도 냉정해 보이는 인상을 풍겼다. 준수는 노아의 살가운 미소에도 전혀 반응하지 않고, 기계처럼 그를 수진의 사무실로 안내했다. 노아는 일단 준수의 체격을 빠르게 살펴보았다. 그는 도훈만큼은 아니지만 꽤나 마른 몸매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당당하게 벌어진 어깨와 곧은 허리를 보건데 운동과 자기관리에 열심인 듯했다.
만약 준수가 도훈을 습격한다면, 단번에 제압해서 살해할 수 있을까?
노아와 수진의 만남은 독대였다. 수진은 화랑관에서와 마찬가지로 매우 당당하고 여유로워보이는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이것은 부족함이라고는 모르고 자란 그녀에게서 매우 자연스럽게 배어나오는 일종의 품격이었다. 하지만 노아는 수진이 자신의 그런 면을 잘 알고 현재 이용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수진은 결코 보이는 것만큼 여유롭지 않았다. 만약 그녀가 정말 여유가 있었다면, 결코 노아를 여기까지 부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단둘이 마주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서정훈 교수님에게 얘기 많이 들었어요.”
수진이 운을 뗐다. 그리고 그것으로 노아는 정훈이 자신과 수진을 이어준 다리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었다. 노아의 반쯤 호소, 반쯤은 협박에 가까웠던 요청이 결국 먹힌 모양이었다. 그리고 이는 화랑관에서 있었던 은밀한 미팅이 살인사건과 연관이 있음을 정훈이 간접적으로 시인하고 있는 꼴이기도 했다.
“이번 살인사건에 관해 조사를 하고 계시다구요.”
“그렇습니다.”
“원래 이런 류의 사건들을 전문으로 다루신다고 들었습니다. 맞나요?”
“미스테리한 범죄들, 특히 살인사건 말이죠? 좋아합니다. 매우 좋아하죠.”
노아의 직설적인 대답에 수진이 흠칫했다. 이렇게 대놓고 얘기할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이때 생긴 틈을 노아는 놓치지 않고 파고들었다.
노아는 수진과 짧게 인사말을 나누는 와중에 이미 수진이란 사람에 대한 파악을 끝냈다. 그녀에게 어떻게 접근할지도 생각해두었다. 수진 같은 사람에게 겸손함은 필요없었다. 어차피 그녀 앞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겸손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수진에게 어필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재훈 같은 자세가 필요했다. 과할 정도로 스스로의 능력을 과시하는 것 말이다.
“저에 대한 조사는 이미 충분히 하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세명 그룹이니까요. 제가 어떤 사람인지 검증도 하지 않고 여기까지 불렀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
“그렇다면 이미 다 들어서 알고 계실겁니다. 제가 경찰의 조력자로 활약하면서 여러 사건들을 해결했던 부분들…… 조금은 저에 대한 신뢰가 생기셨나요?”
“솔직히 놀랐습니다.”
수진이 인정했다.
“기자님 같은 분이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다는 사실이요. 기자님이 세우신 공의 반의 반도 대중에게는 공개되지 않은 것 같더군요. 기자가 아니라 탐정을 하셔야 하는 게 아닌가요?”
“탐정을 할 만큼 뛰어나진 못해서요.”
이제와서 겸양을 떨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것만큼은 노아가 진심으로 믿고 있는 사실이었기 때문에 거의 반사적으로 튀어나왔다. 노아는 바로 말을 이었다.
“어쨌든 제가 이번 살인사건을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셨기 때문에 저를 부르신 게 아닙니까?”
“어떤가요?
수진이 질문에 질문으로 답했다.
“자신있으신가요? 이번 사건의 범인을 잡으실 수 있으신가요?”
“아마도요.”
노아가 씨익 웃었다.
“아직 조사중이기 때문에 모든 문제들이 해결된 것은 아니지만…… 하나 하나 차근차근 풀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다 여기까지 오게됐죠.”
“.......”
“수진님에 관해서도 그렇습니다. 경찰에 의하면 수진님은 김준호 관장과 도서관에서 8시 25분에 미팅을 가지셨다고 들었습니다. 저희 작은 아버지도 자리에 있었던 것 같구요. 공교롭게도 피해자와의 미팅 이후에 있었던 미팅이지요. 제가 추측하는 바로는 아마 피해자와 나눈 이야기와 관련해 김준호 관장이 수진님께 보고하는 자리가 아니였을까 싶은데요…….”
“.......”
“애초에 그날 파티에 찾아오신 것도 마주환 작가를 축하해주기 보다는 이 미팅 때문에 오신 게 아니었나요? 만약 그렇다면 피해자와의 만남 뒤에 상상 이상으로 크고 중대한 무언가가 있다고 밖에 볼 수 없겠죠. 김준호 관장도 본인 선에서 처리하지 못하고 수진님께 보고했다는 것은, 그만큼 큰 일이라는 뜻 아니겠습니까?”
“.......”
“혹시 김준호 관장과의 미팅 전까지, 어디 계셨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동관 라운지에 있는 방들 중 하나에 있었죠.”
의외로 수진이 순순히 답했다.
“애초에 그럴 목적으로 만들어놓은 방이니까요. 파티니까 형식적으로 사람들을 상대한 다음 자리를 피했죠. 사람 만나는 걸 싫어하진 않지만, 그날은 그럴 기분이 아니었으니까요.”
“피해자와의 미팅을 신경 쓰고 계셨던 거죠?”
“그랬다면 어쩌실 거죠?”
수진이 돌연 노아를 노려보았다.
“반드시 이날 강도훈 작가와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 알아내실 생각이신가요?”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노아가 대답했다.
“전 그날의 미팅과 이번 살인사건이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니까요.”
“그 미팅 때문에 강도훈 작가가 살해당했다는 뜻인가요?”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노아가 신중히 말했다.
“전 피해자가 화랑관을 협박했다고 생각합니다. 뜻하지 않게 화랑관의 어떤 약점을 쥐게 돼서요. 이때문에 화랑관도 피해자의 무리한 요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미팅이라는 형태로 끌려다니다가, 결국 수진님에게까지 도움을 청하게 됐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요?”
“하지만 만약 수진님의 질문의 뜻이 누군가가 화랑관의 약점을 묻어버릴 동기로 피해자를 살해한 거냐고 한다면, 아마 매우 높은 확률로 아닐 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죠?”
수진의 어투가 조금 부드럽게 변했다. 이 변화는 그녀가 무엇을 신경 쓰고 있는지 명확히 보여주고 있었다.
“살인사건의 현장으로 화랑관을 골랐으니까요.”
노아가 거침없이 설명했다.
“그것도 피해자와의 매우 은밀한 만남이 일어난 후에 말입니다. 경찰은 바보가 아닙니다, 수진님. 경찰도 분명 이점을 수상쩍게 생각하고 뒤에서 조사 중일겁니다. 다시 말하자면, 피해자를 죽임으로써 입막음이 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피해자가 살해당했기 때문에 쉽게 묻어버릴 수 있었던 화랑관의 약점이 이렇게 드러날 위기에 처해버렸지요. 저 같은 사람에 의해 말입니다.”
“.......”
수진은 복잡한 얼굴이 됐다. 노아의 말이 기쁘면서도 또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는 모양이었다. 이러나 저러나 결국 화랑관의 치부를 밝혀야 하는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한 가지 약속을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한참의 침묵 끝에 수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 노아는 화답했다.
“무엇이든지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제 아버지의 명예를 지켜주세요.”
수진이 어렵사리 말을 끝마쳤다.
“약속해주실 수 있을까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
노아가 너무 순순히 약속하자 도리어 수진이 당황한 것 같았다.
“이게 어떤 의미인지 알고 그렇게 약속하시는 건가요?”
“모릅니다. 하지만 제게는 큰 상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전 미술인이 아니니까요.”
“떠본 거였어요. 재훈 형님이 제게 알려준 소문을 기반으로 말이죠. 나는 미술인이 아니니 설사 윤창섭 사장이 부정한 행위로 수상을 한 전적이 있더라도 관심 없다는 뜻이었죠. 마치 제가 피해자가 화랑관을 협박한 내용, 그 약점을 이미 알고 있는 듯한 뉘앙스를 풍긴 거죠.”
차안에서 노아는 그렇게 말했다.
“만약 피해자가 화랑관을 협박한 내용이 윤창섭 사장이 저지른 부정행위에 대한 게 아니라면, 제 대답은 동문서답이 되는 꼴이에요. 하지만 수진 씨의 반응은 담담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내가 이미 대략적으로 짐작하고 있다고 믿는 눈치였어요. 본의 아니게 피해자가 잡은 화랑관의 약점이 무엇인지 알려준 셈이죠.”
“그렇다면 역시…….”
“윤창섭 사장이 과거 예술가로서 용납될 수 없는 무언가를 한 건 틀림없어요. 물론 자세한 건 이제 김준호 관장을 만나면 알게 되겠지만…….”
기념관 내부를 다 돈 노아와 정민은 입구로 다시 돌아와있었다. 노아는 벽면에 상세히 적힌 윤창섭 사장의 일대기를 다시 읽어보고 있었고, 정민은 혼란스러운 마음을 겨우 가라앉히는 중이었다. 노아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리는 듯했다.
“그나저나 윤창섭 사장은 대단한 분이긴 했네요. 미술에 진심이었던 것 같아요. 안타까운 일이에요. 그렇게 미술을 사랑하고 공헌했는데도 불구하고 결국 제대로 된 인정을 못 받는 거잖아요? 화가로서 재능이 없다는 이유로 말이에요…….”
직후, 기념관에 화랑관 직원 중 한 사람이 들어왔다.
김준호 관장이 두 사람을 만날 준비가 됐다는 소식을 전하기 위해 온 직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