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근한 마음.

아전인수일수도.

by kimsoodahl

언니에게 커밍아웃을 한 날은 언니가 병원에 진료를 받으러 온 날이었다.

잠깐 짬을 내어 같이 커피 한 잔을 했다. 왜인지 문득 지금 얘기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카 없이 언니를 만나 대화를 할 수 있는 기회가 흔하지 않았었기에.

형부는 이미 알고 있었다. 가족이지만 객관적 시각을 가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진작에 찾아가서 말을 한 터였다. 그때는 가족 모두를 속이고 무작정 집을 나와 반려와 살기 시작하면서 가족들 앞에서 거짓말을 하는 것이 일상이 되고 그게 마음이 불편해서 가족들과 연락을 뜸하게 하고 피하기만 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다 보니 그동안 나를 이루고 있던 큰 부분인 가족이 내 인생에서 빠져버렸고, 나는 누구인지 왜 갑자기 내 인생이 이렇게 되었는지 혼란스러웠다. 폭탄을 형부에게 던지는 건 이기적인 행동이었지만, 누구에게라도 말하고 지지를 얻고 싶었던 것 같다.


'처제 지금 행복한 거지?'

형부는 이거 한 가지만 물어봤다.

'처제가 행복한 거면 그거면 됐어.'

내가 그 당시에 갑작스러운 큰 인생의 변화로 스트레스가 컸던 때라 가족들 앞에서 항상 얼굴이 좋지 않았으리라 짐작한다. 가족들은 내가 집도 나가 버리고, 만나러 오려고도 안 하고, 전화도 잘 안 받고, 어쩌다 보면 얼굴도 좋지 않으니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안타까워했고, 멀어진 느낌에 슬퍼했다. 엄마는 자주 오지 않는다며 언성을 높이기도 했다. 형부의 말과 반응이 많은 위로가 되었다.


언니는 생각보다 덤덤하게 받아들였다. '형부가 이미 알고 있다니 그게 더 놀라운데?'라는 반응이었다. 왜 집을 나가야만 했는지, 최근에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이제 이해가 된다며 우리와 멀어지려 그런 게 아니니 다행이라고 했다. 병원 커피숍에서 눈물이 났다. 나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며칠이 지나 언니가 킨 카톡을 보내왔다. 부모님을 속이고 나와서 연인과 살고 있는 것은 잘못이라고 했다. 그 연인이 남자라도 마찬가지일 테니 이건 네가 여자를 만나서 그러는 게 아니라는 말과 함께. 그리고 부모님께 말씀드리라는 말도 했다. 스트레스가 밀려왔다.


아마 언니가 그 며칠 내내 내 생각을 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내가 이기적으로 폭탄을 던졌구나.

덤덤하게 받아들인 게 아니라 사고가 멈춰 반응을 할 수 없었던 게 맞았을지도 모른다.

말을 하지 않는 게 죄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말을 하고 나니 또 죄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안하면서도 속이 상했다. 나도 내가 잘못한 건 안다고! 화가 나기도 했다. 방귀 뀐 놈이 성낸다고, 딱 그 꼴이었다. 미안하다고, 근데 그렇게 남을 속이면서 살 수밖에 없는 게 우리 같은 사람들의 삶이라 이해해 줬으면 좋겠다고 답장을 했다. 지금도 마음이 힘들어 그때의 카톡대화를 다시 읽을 수가 없는데, 취지는 그랬다. 언니가 너도 생각을 얼마나 해서 한 결정이겠냐고 알겠다고 했다.


그 뒤로 또 그렇게 마음 불편한 시간들이 지났다. 반려에게는 형부에게 말한 것도, 언니에게 말한 것도 '왜 그랬어'라는 반응을 받았다. 초짜 퀴어의 성급한 행동으로 취급받았다.


어느 날 부모님 댁에 다녀왔더니 강아지들이 격하게 반겨주었다. 반려는 친구들과 여행을 가서 강아지 셋이서 집을 지키고 있던 터였다. 달려드는 강아지들을 안아주고 만져주는데 눈물이 났다. 부모님 댁에 다녀오면 자주 이렇게 눈물이 난다. 그 모습을 반려가 보면 항상 걱정 + 마음 아파하기 때문에 꾹 참는 편이었는데 이 날은 그녀도 없으니 마음껏 울었다.


한두 달쯤 지났을까. 드라마 파칭코가 화제가 되고 있을 때였다. 선자가 '나를 감추고 평생 살 수는 없는 것이었다'라는 요지의 대사를 한다. 그 대사를 들으며 스스로 내 선택을 또 정당화했다. 물론 동성애에 대한 내용은 전혀 아니었지만.


그러고서 어느 날 인스타그램을 보는데 언니가 그 장면을 올려놓은 것이다. 선자의 말에 동의한다는 취지의 포스팅.

'나한테 하는 말일까.'

괜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최근 들어 생각하고 싶은 대로 생각해 버리는 습성이 생겼다.


처음에 문자를 주고받은 뒤로 언니는 나에게 부모님께 말씀드리라는 말을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엄마가 선보라고 할 것 같으니 조심하라는 경고는 여러 번 보내줬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초반의 마음 불편함과 들킬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지금은 많이 좋아졌다. 반려는 내 룸메이트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가끔 우리 부모님 댁에 들러 식사를 같이 한다. 아직도 나는 이렇게 부모님을 속이고 있는 게 잘못인 것 같다. 하지만 처음에는 반려의 존재조차 언급하고 싶지 않아서 가족들을 피해 도망 다녔다면, 지금은 가까운 친구로서 우리가 잘 지내고 내가 잘 지내고 있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언니도 형부도 가끔 있는 부모님의 결혼 공격에 나를 실드 쳐주는 든든한 내 편이 되었다.

아직도 완전히 모든 것이 편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이 정도만 되어도 '미치겠다'라는 느낌이 들던 힘든 시기보다는 훨씬 마음이 편하다. 엄마와 전화도 자주 하고 집에 자주 들르고 전보다 더 편한 사이가 되었다.

물론 이렇게 영원히 지낼 수 없음을 알고 있다. 그래서 이 평온함이 두렵기도 하다. 하지만 일단은 지금에 충실하며 가족들에게 고마워하고 마음을 표현하며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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