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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an Apr 28. 2022

세계사를 바꾼 7개의 강 75

3. 1차 대전의 뫼즈강

팽팽한 균형 

   

팔켄하인은 속전속결로 전투를 끝내려 했다. 베르뎅에서 승리하면 이 전쟁의 양상을 바꾸어 놓을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러나 그의 상상은 좀처럼 현실과 연결되지 않았다.  


전투의 초반은 성공이었다. 전투개시 4일 만에 프랑스의 방어선이 무너지며 두오몽 요새를 손에 넣었다. 팔켄하인은 참모들과 프랑스제 샴페인을 터트렸다. 그러나 독일군은 두오몽 요새를 제대로 지켜내지 못했다. 


뫼즈 강을 사이에 두고 양군은 포격을 퍼부은 후 공격과 후퇴를 되풀이했다. 플뢰리 지역은 두 달 사이 16번이나 국기가 바뀌었다. 하루는 독일, 다음 날은 프랑스 국기가 플뢰리 하늘에서 펄럭거렸다. 


이후 베르뎅 전투는 느리고 끔찍한 살육전으로 변모했다. 양국의 젊은이는 속절없이 죽어 나갔다. 가장 어리석은 전쟁으로 표본으로 남았다. 죽고 또 죽였지만 어느 쪽도 승자는 없었다. 


독일군의 포병 화력은 우세를 점하고 있었으나 인근 솜에서 전투가 벌어지는 바람에 다시 평형을 이루었다. 영국군까지 가세한 솜 전투에 독일군은 포병을 포함한 병력의 일부를 보내주지 않을 수 없었다. 


전선은 교착상태에 빠졌고, 사상자는 늘어났다. 독일군 총사령관은 나중에 회고록에서 “결정적 승리를 거두진 못했지만 프랑스군이 오래 버티진 못할 것으로 믿었다”며 자신의 오판을 시인했다.  

    

독일은 개전 초기 승세를 잡기위해 ‘무자비한 압박’ 전술을 펼쳤다. 나폴레옹의 전술 그대로 ‘닥공’만이 살길이라 판단했다. 이를 위해 끌어 모을 수 있는 포병과 대포는 최대한 동원했다. 프랑스군 진영에 밤새 무지막지한 포탄을 쏟아 부었다. 


프랑스의 초반 열세에는 정보국의 오판도 한 몫을 했다. 정보국은 1916년 새해 독일이 베르뎅을 목표로 삼을 것이라는 첩보를 입수했으나 무시했다. 7군단을 강의 서안으로 보내 최소한의 대비를 하지 않았더라면 완전히 무너졌을 것이다. 

프랑스군은 진지했다. 그들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뫼즈 강 서쪽으로 독일군이 넘어오는 것만은 막아라”는 사령부의 명령을 고수하려 들었다. 프랑스도 베르뎅의 중요성을 익히 알았다. 


두오몽 요새의 함락 소식을 들은 후 베르뎅 인근 사단 수를 20½로 늘렸다. 그러자 독일군은 수적 열세에 빠졌다. 포병의 앞선 화력으로 간신히 버텨나갔다. 당시 프랑스군의 주포는 75㎜였으나 독일군은 훨씬 큰 중포로 무장하고 있었다. 프랑스군은 5월에 155㎜ 포 2개 군단을 보내 열세를 만회코자 했다. 


독일군의 기세, 프랑스군의 끈기가 팽팽한 균형을 이루었다. 그 균형의 경계에서 희생자의 수만 늘어났다. 양측 참호의 중간 지점은 전사자와 온갖 버려진 것들로 가득했다. 화약 냄새를 잔뜩 머금은 대지는 생명을 잃어갔다. 죽음의 땅(No Man`s Land)이 됐다.      


독일군은 백 년 전 자신들을 괴롭힌 적장 나폴레옹의 전술을 숭배했다. 적의 약한 고리를 골라 병력을 집중시키는 전술이었다. 전선의 일점을 돌파하면 적은 단숨에 무너진다. 


적의 전술을 배웠으나 정작 간과한 것은 20여 년 전까지 자신들의 수상이었던 ‘철혈재상’ 비스마르크의 당부였다. 프랑스를 상대하려면 러시아와는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동과 서 두 개의 전선이 한꺼번에 펼쳐지면 독일은 감당해낼 수 없다. 


그러나 이미 비스마르크는 죽고 없었다. 그의 경고대로 두 개의 전선 함정에 빠진 독일은 진퇴양난에 허우적댔다. 지루하고 파멸적인 전쟁을 끝낼 희망은 바다 건너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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