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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진 Oct 29. 2021

어쩌다 여기까지 왔을까

<남해에서 책방하고 사는 이야기> 2. 어쩌다 여기까지 왔을까



초등학교 4학년쯤이었을까. 학교 도서관에서 기억에 남는 첫 인생 책, 『로빈슨 크루소』를 만났다. 너무 재밌어서 집에 갈 수가 없었다. 앉은자리에서 다 읽어버리고 도서관 문 닫을 시간이 되어서야 겨우 나왔다. 집에 가는 길 내내 가슴이 두근거렸다.


중학생이 되어서는 『해리 포터』 시리즈와 『드래곤 라자』를 읽으며 판타지 세계에 푹 빠졌다. 3학년 때 두 번째 인생 책을 만났다. 종합반 학원 국어쌤이 읽어준 하루키의 단편 소설, <4월의 어느 맑은 아침에 100퍼센트의 여자를 만나는 것에 대하여>였다. 읽는 데 5분도 걸리지 않는 정말 짧은 이 소설은 단숨에 사춘기 소녀의 마음을 흔들어놓았다. 최근에야 비로소 제목을 틀리지 않고 말할 수 있게 되었지만, 아주 오랫동안 이 소설을 좋아했다. 책방을 열면서 제일 먼저 입고했을 정도로.


고등학생 때 기억나는 책은 『EBS 수능특강』뿐이라 넘어가고, 대학생이 되어서도 술 마시고 노느라 바빠서 책에 대한 기억은 흐릿하다. 대신 음악과 영화에 빠졌다. 공대 밴드 동아리에 들어가서 인디음악부터 헤비메탈까지 가리지 않고 들으며 베이스 기타를 쳤다.


분명히 과제나 시험공부 하려고 갔던 동아리방(애초에 과제를 하려면 도서관에 가야지 왜 동방에 가나…)에서 어느새 노트북 하나에 여러 명이 붙어 각자 편안한 자세를 한 채 좀비 영화 <새벽의 저주>를 봤고, 막차가 끊길 때까지 동방에서 술 마시다가 갑자기 삘 받아서 다 같이 걸어간 동대문 메가박스에서는 영화 <2012>를 심야로 봤다.


맥주부터 소주, 배갈까지 일단 알코올이 함유되어 있다면 뭐가 됐든 위장에 들이부었고, 연애도 쉬지 않고 열심히 하며 학점을 망쳤다. 이때는 정말 뭐든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했다. 내게 영감과 취향이라는 게 있다면 아마 이때 생긴 것이 대부분일 테다.


그러다가 인생 영화 ‘비포 트릴로지 만났다. 대학 졸업 직전 입사를 앞두고 친구 J 떠난  유럽 여행에서 <비포 선라이즈> 촬영지를 따라 여행했을 정도로 많이 좋아했다. 여행 가기 전에도 보고 여행 중에도 보고 집에 돌아와서도 봤다. 여행  가장 인상적이었던 곳은 <비포 선셋> 촬영지이자 유명 서점인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였다. 일정이 남은 친구와 헤어지고 귀국하기  혼자 찾아간 곳이었기에 서점 분위기에  사로잡혔는지도 모르겠다.


서점 곳곳에서 오래된  냄새가 났고, 사람이  많았는데도 각자의 자리에 앉아서 책을 읽느라 조용했고, 햇빛이 비치는 2 창가 책상에는 묵직한 수동 타자기가 놓여 있었고. 내가 읽을  있는 책은  권도 없었지만,  풍경을 눈에 담는 것만으로 행복했다. 한국에 돌아가기 싫은 마음을 달래느라 갖은 애를 쓰면서 천천히 오래 머물렀다. (책을  사고 나왔으니 지금 생각하면 진상각….)


갑자기 왜 영화 얘기로 빠졌나 싶지만, 여행지에서 서점, 그러니까 책방을 방문하는 것이 이렇게 좋은 경험이라는 걸 그때 처음 느꼈다. 그다음부터는 꼭 책이 있는 곳 위주로 여행 루트를 짜고 아무리 짐이 무거워도 책 한두 권을 꼭 챙기게 되었으니 어떻게 보면 아주 큰 영향을 받은 셈이다.


그 후 일상에서도 책은 내 숨통을 틔워주는 존재가 됐다. 내내 의미 없는 미팅으로 시간을 버린 날, 부장님께 말도 안 되는 스케줄로 업무 지시를 받은 날, 밥까지 구내식당에서 때우면 진짜 토해버릴 것 같은 날에는 점심을 거르고 광화문 교보문고에 갔다. 숨통을 틔우려고 최선을 다해봤지만 어쩔 수 없이 ‘나랑은 맞지 않는 곳이구나’ 느끼고 나서는 퇴사할 수밖에 없었고.


퇴사 후 제주에서 몇 주, 몽골에서 한 달, 속초에서 육 개월을 보내며 여기저기 여행했다. 마지막 여행지였던 속초에서 치워도 치워도 끝이 없는 눈(쓰레기)을 치우다가 다음 여행은 무조건 따뜻한 곳으로 가자고 단단히 마음먹었고, 그렇게 남해까지 왔다.


어딜 가든 책방부터 검색해보는 나. 하지만 남해에는 책방이 거의 없었다. ‘유명한 관광지도 꽤 있으면서 책방이 없는 게 말이 돼?’ ‘그러면 여기서 책방을 해봐도 괜찮겠다.’ ‘아니 정말 괜찮을까?’ 답 없는 고민을 반복하다가 2018년 3월 17일, 지족마을에서 아마도책방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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