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태어나서 미국에서는 학위를 받은 적이 없는 나는 소위 "토종" 이긴 하지만, 조금 다른 토종이기는 하다. 나는 초등학교때 아버지의 직장 때문에 온 가족이 1년반 정도 미국에서 생활을 해서 그때 아주 쉽게 영어를 입문하게 되었다. 저학년이어서 그런지 당시 아주 빠르게 영어를 배우게 되었고, 이때의 경험이 나의 인생에 전반적으로 아주 큰 도움이 되게 된 기반이 되었다.
이후 한국에 돌아와서도 꾸준한 영어에 대한 노출 덕분에 수능, 토익, 토플 등도 비교적 어렵지 않게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대학 때도 다른 나라들과 교류하는 국제 교류 프로그램이라던가, 미국/홍콩 등으로 교환학생을 가서도 언어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한국에서 대기업을 다니다가 외국계에 쉽게 취업할 수 있었던 이유도 아마 영어 구사가 자유로웠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러한 나의 영어 실력을 이야기하고자 이번 편을 기획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할 수 있겠다. 다만 미국에 일하러 오기 전까지 나의 상황이 어땠는지 알려드리고 싶어서였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내가 영어로 인해 얼마나 큰 자괴감을 느꼈고 어떻게 극복하면 좋을지 고군분투 했던 나의 성장기를 공유하고 싶어서이다.
한마디로 영어는 나의 인생에서 큰 무기이자 장점이었다. 이곳 실리콘 밸리에 오기 전까지는.
내가 미국으로 이직을 했을 때 영어 걱정은 하지 않았던 것은, 당시 너무 상황이 바빠 걱정할 겨를이 없었던 것도 있었겠지만 이미 외국계 회사에서 영어를 아주 많이 쓰는 환경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다른 APAC 동료 및 고객들과 이야기 할 때 당연히 영어로 커뮤니케이션을 하였고, 회의 및 대화를 문제없이 주도하였다. 미국 본사 사람들과 이야기 할때도 어떻게 그렇게 영어를 잘하냐며, 오히려 나를 추켜 세워주기까지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외국인치고" 잘하는 것이었는데 나는 그것을 인지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리하여 이곳에 온 이후 몇주만에 무엇인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대화를 할때 주눅이 드는것은 다반사이고, 회의 할 때 적절한 표현이 생각나지 않아 얼굴이 벌겋게 된 경험이 생기기 시작했다. 어떤 특이한 단어를 이해하지 못해서 아는 척 한다고 애를 쓰는 경우도 있었다. 혹은, 분자/분모 (numerater, denominator) 등 자주 쓰지는 않지만 간단한 단어가 생각이 나지 않아서 어쩔 줄 모르는 상황도 발생했다. 더 황당한 것은 미국인을 보면서 "저 사람은 어떻게 영어를 저렇게 잘하지?" 라는 생각으로 넋을 놓고 보며 부러워 하는 상황도 있었다. 이전 회사 채팅방에서는 어떻게 하면 쿨하고 재미있게 이야기를 할수 있을까, 아니면 내가 하는 말이 혹시 적절한 말이 아니면 어쩌지 하는 자기검열도 많이 하게 되었다. 미팅을 들어가기 전 또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어떡하지, 라는 걱정이 앞서 자신감이 내려가는 상황들도 여러번 발생했다.
지금 생각 해 보면 영어가 모두 제 2외국어인 사람들과 영어로 대화를 하는 것과 영어가 모국어인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였을 느낀다. APAC에 있을 때는 대부분의 동료들이 영어가 제2외국어이기 때문에 나의 조금 부족함이 크게 느껴지지 않고, 마찬가지로 남의 부족함에 대해서도 아무 생각이 없었다. 제2외국어이기 때문에 언어의 부족함은 당연한 것이다. 영어가 그냥 우리의 공용어였을 뿐, 모국어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 같은 경우는 그 중에서도 영어를 조금 더 구사를 잘 하는 경우였기 때문에 오히려 조금 더 빛을 발한다는 착각을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영어가 모국어인 사람들이 많은 미국에서는 제 2외국어로써의 영어를 조금 더 잘한다는 것이 그래봤자 원어민보다는 훨씬 못하는 상황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이 상황에서 나의 조금의 버벅거림이 훨씬 더 크게 보이는 느낌이 들었고, 유창한 영어(자기의 모국어)로 회의를 이끌어가고 나와 이야기를 하는 동료들에게 기가 눌리는 상황이 되기도 했다. 이곳에서는 영어가 공용어일 뿐만이 아니라 모국어인 사람이 많다는 것을 자각하고 난 이후에는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이것을 깨닫지 못했다!), 나의 영어가 커리어에 있어 가장 큰 단점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처음 하게 되었다.
또 하나 생각을 해봐야 하는 것은, 회사라는 곳은 프로페셔널한 곳이기 때문에 당연히 프로로 보이고 싶다. 어떤 언어적인 것으로 질문을 한다던가, 이해를 못하는 일이 생기면 프로페셔널하게 보이지 않을거라는 생각이 나를 더 주눅들게 했다. 더욱이 당시 나는 한국에서 약 6년의 경력을 가지고 미국에 왔기 때문에, 신입 초짜로 보이고 싶지 않았다.
반면에 사적인 자리에서는 어떤 단어를 이해를 잘 못한다고 해도 질문하는 것이 부끄럽지 않다. 실제로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나는 부끄러움 없이 그 단어의 뜻이 무엇인지 되묻고는 한다. 그저 나의 친구와 대화를 하는 상황이고 내가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라는 사실을 다 아는 사이에서 나의 부족함을 보이는 것은 창피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회사에서는 일적으로는 무시 당하고 싶지 않은 생각이 컸기 때문에, 나를 본인들과 다른 사람들로 생각하거나 취급하지 않기를 바람이 있었다.
영어는 그렇게 나의 삶의 큰 무기에서 골칫덩어리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이 상황을 어떻게 돌파해야 할지 그 당시에는 감이 오지 않기도 했다. 그래서 나의 커리어가 어떻게 될지는, 안개속에서 걷는 기분이었다. 커리어 욕심이 많았던 나로서는 급브레이크를 밟힌 기분이라고나 할까. 어쩌면 커리어적으로의 성장의 한계는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안타까운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아니면 적어도 나의 커리어는 원점으로 돌아간 느낌은 확실히 들긴 했다.
"영어는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다."
영어를 조금 한다고 해서 영어로만 커리어를 쌓지 않기를 바라셨던, 그래서 학생 때 이과로 진학을 강력히 추천하셨던 아버지가 누누히 하셨던 말씀이다. 더욱이 미국에서는 영어는 목적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좋은 소식은 영어는 게임이 아니기 때문에 승자도, 그리고 패자도 없다는 것이다. 나는 나의 반대편에 앉은 미국인 동료와 누가 더 영어를 잘 하는지 경쟁을 하지 않는다. 서로 공동의 비지니스 목표가 있는 파트너이고 업무를 하는 협력관계이지, 누가 더 수려한 영어를 단어를 썼는지에 대해 관심이 없고, 또한 그에 따른 보상도 없다.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우리들에게는 언제까지나 숙제이겠지만, 좌절은 금지다. 다음편부터는 내가 나의 상황에서 어떻게 조금씩 영어에 대한 좌절감을 극복했는지, 그리고 프로페셔널한 영어 실력을 어떻게 쌓아갔는지 공유하고자 한다. 그 여정은 여전히 진행중이고,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아지길 소망하며 매일매일 노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