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 9일 차. 어기호수

어기호수의 노을을 보며

by 아성조

지금 어기 호수 위 조각배 안에서 떠 있는 순간을 내가 오래도록 기억했으면 했다. 호수인지 바다인지 구별도 되지 않게 커다랗고 새파란 물과 그날의 공기를. 여행이 마무리되고 있는 순간의 아쉬움과 무사한 안도를. 스물여덟의 여름은 지금까지 다시 곱씹을 정도로 꽤 괜찮았었다는 추억까지도. 모두 다.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벌써 끝을 떠올리는 마음. 한국도 몽골도 모두 그리워져 버리는 이상한 감정. 몽골에서의 아홉 번째 아침은 그렇게 시작됐다.

오늘도 달리는 푸르공

아쉬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차는 또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이제 이 초원을 보는 것도 마지막이다 생각하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자꾸 모든 것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싶었다. 작은 것까지도 말이다. 몽골에서의 며칠 동안 초원은 늘 그 자리에 있었고, 언제나 같은 모습으로 펼쳐져 있었다.


초원의 색과 건조하게 부는 바람, 멀리 보이는 가축 떼와 그 뒤로 흐르는 하늘까지도. 덜컹거리는 푸르공 속 이 순간도. 좋은 것도 힘들었던 것도 모두. 아직 떠나지 않았는데, 분명 일정이 남아있는데. 벌써 작별 인사를 하는 기분이다.




점심으로 먹은 음식은 몽골식 튀김만두 호쇼르였다. 이동하던 와중 현지 식당에 들어가 간단히 먹었다. 기름에 튀긴 반달 모양의 만두 안에 고기가 가득 들어 있는데, 처음엔 낯설 것 같았던 맛이 의외로 익숙했다.

몽골 음식 중 한식에 가까운 느낌이었고, 한 입 베어 물자 문득 대구의 납작 만두가 떠올랐다. 아마도 얇은 피와 기름진 풍미 때문이었을 것이다.


호쇼르는 몽골을 대표하는 전통 음식으로, 주로 양고기를 다져 넣어 기름에 튀겨 먹는다. 유목 생활을 하던 몽골인들이 비교적 간단하게 조리하면서도 열량을 충분히 섭취하기 위해 만들어 먹던 음식이라고 한다. 지금까지도 나담 축제 같은 행사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몽골의 대표 음식으로 기름기가 많아 탄산음료를 곁들여 먹는다.


다만 식당의 컨디션은 충격적일 만큼 좋지 않았는데, 위생 상태나 분위기가 여행자의 기대치와는 꽤 거리가 있었다. 마음속으로 불평불만을 잔뜩 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한국에 와 생각해 보니, 자연 속의 식당이었으니 당연한 건데 싶다. 매번 어떻게 다 만족스럽겠냐 싶은 게.




항상 난 욕심이 많았다. 부정하고 싶은데, 그랬던 것 같다. 여행을 한 번 가도, 웅장한 자연도 탐이 나고, 근데 호텔 이불도 뽀송뽀송했으면 좋겠고. 밥도 맛있고 외국인들도 친절하면 금상첨화겠거니 당연하게 생각했다.


일상을 살아갈 때도 마찬가지다. 다 탐이 나고 부럽고 뭐 하나 놓치고 싶지가 않고. 안정적인 생활, 꿈, 사랑, 외모, 건강, 가족의 안녕, 사람들의 평판까지 내 손은 딱 두 개뿐인데, 다 갖고 싶어서 애를 썼다. 뭐 하나라도 삐그덕 대면 삐그덕 대는 것만 하루 온종일 보였다.


여행을 하다 보면 종종 이런 순간이 온다. 내가 동경하던 풍경과 현실 사이의 간극을 마주하는 순간. 몽골에서도 당연히 그랬다. 모든 걸 가질 순 없다.


예쁜 푸르공을 타고 싶으면, 스타렉스의 빵빵한 에어컨은 포기해야 했다. 가격이 싼 여행 프로그램을 택하려면 이틀정도는 점심때 길바닥에서 라면 정도는 끓여 먹는 패기가 있어야 했고, 쏟아지는 별을 구경하려면 어둠 속 추위를 한창이나 견뎌야 했다. 고비 사막은 죽을 만큼 힘든 인생의 고비와 죽기 전에도 생각날 아름다운 풍광을 동시에 주고 떠났다.

예쁜 풍경과 화장실은 등가교환

그래. 이런 누구한테 보여주기 싫은, 숨기고 싶은 마음까지도 또한 여행의 일부겠지.




마침내 도착한 어기 호수. ‘호수’라는 단어로는 이 풍경을 온전히 설명할 수 있을까? 바다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웅장함과 푸른빛은 우리를 또 다른 세계로 이끌었다. 새삼 몽골이 대자연의 나라라는 것이 느껴졌다. 사막과 초원, 암벽과 호수를 한꺼번에 볼 수 있는 나라라니!


멀리서 호수가 보이기 시작했을 때도 이미 충분히 크다고 느꼈는데, 막상 도착하고 나서도 호숫가를 따라 한참을 더 이동해야 했다. 물가에 도착했다는 감각이 들기까지는 거의 한 시간도 넘게 더 달린 것 같다.

마침내 보이는 어기호숫가

어기 호수는 몽골 중부 아르항가이주에 위치한 담수호로, 면적은 약 25.7㎢, 둘레도 약 20km에 달한다. 몽골 내에서 바다처럼 수평선을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장소이고, 철새들의 중요한 서식지이자 람사르 협약에 의해 보호받는 습지로 지정된 곳이기도 하다. 관광지이면서도 여전히 자연의 질서가 잘 보존된 장소라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잔잔한 어기호수 위로 구름이 비쳤다. 물 위에 비치는 두꺼운 구름은 탄성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날이 맑지 않았는데, 맑지 않은 대로 운치가 있었다. 시내는 보트를 타러 가자고 우리를 이끌었다. 가격은 1인당 8만 투그릭. 여행 막바지에 다들 예산이 거의 떨어져 가 망설임이 아주 없었던 건 아니었지만, 이곳까지 와 호숫가에 가만히 서서 풍경만 감상하고 떠난다면 분명 후회하리라.

보트는 물 흐르듯 출발했고, 우리는 호수 한가운데로 나아갔다. 호수 위 조각구름들은 물결에 부서지고 다시 만들어지기를 반복했다. 사방을 돌아보아도, 지금은 온 세상이 물이다. 짙은 파란색 물과 구름이 껴 살짝 어두운 남색 하늘. 여기저기를 보아도 온통 파랗다.

보트에서 내려 호수 전경을 바라보았다. 노을이 지기 시작했다! 하늘은 서서히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우리는 에어배드를 꺼내 호숫가에 펼쳤다. 노을과 분홍빛 하늘을 베개 삼아 누웠다. 노을은 그 어떤 나라에서 보아도 벅찬 매력이 있다.

아름다운 일몰. 어기호수의 또 다른 절경이다.

어기호수의 일몰을 보고 있자니 여기까지 오기까지의 시간들, 이 여행을 결심했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너무나 아름다운 지금. 드넓은 호수의 매력도 일몰까지도 보여주는 이곳이 너무나 소중하다. 사진보다 눈으로 봐야 한다고 매번 말해왔지만, 오늘만큼은 카메라를 들고 이곳저곳을 찍기 시작했다.

친구가 사진찍는 설정샷을 찍어줬다
아름다웠던 어기호수의 풍경들


저녁은 닭고기 스테이크와 산자나무 와인이었다. 산자나무 열매는 몽골을 비롯한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오래전부터 약용과 식용으로 활용되어 온 와인인데, 향이 새콤 쌉싸름했다. 여행의 마지막 저녁이라는 분위기 덕분인지 더 특별하게 느껴진다.


마지막 밤은 기어코 돌아왔다. 마지막으로 별을 볼 수 있는 날에 우리는 캠프 파이어를 하기로 했다. 타오르는 모닥불 앞에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아쉬운 마음에 하늘을 올려다보고, 또 올려다봤다.

캠프파이어
마지막 날에도... 술은 빠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