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유주에 취한 건지, 별에 취한 건지-
온천욕을 마치고 게르로 향하는 길, 오랜만에 개운해진 우리를 기다리는 즐거운 이벤트가 하나 더 있었다. 바로, '마유주'와 함께하는 주안상!
몽골은 참 이상하다. 이상하게도 늘 뭔가가 튀어나온다. 초원은 끝이 없는데, 갑자기 무엇인가 나타난다. 진짜다. 표지판도, 상점도, “여기서 뭘 팔아요” 같은 기척도 없는데, 어느 순간 하얀 게르 하나와 말 몇 마리, 그리고... 무엇인가! 어쩔 때는 슈퍼였다가, 또 어쩔 때는 옷가게였다가, 기념품점이었다가, 식당이었다가!
그래, 이쯤 되니 사실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옹기종기 건물과 사람이 몰려있는 마을보다, 하얀 설원에 띄엄띄엄 나타나는 베이스캠프처럼 그날도 게르는 갑자기 나타났다. 게르를 보자마자, 시내가 그날따라 유난히 신나 보이는 게 조금 달랐지만. 저긴 꼭 들러야 된다나? 평범해 보이는 저 게르 안에는 또 뭐가 있으려나.
푸르공에서 내려, 게르로 들어가자, 나무로 된 커다란 기구 같은 것이 제일 먼저 눈에 띈다. 저게 뭐지? 거중기 같이 생겼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 시내가 눈을 반짝이면서 말했다.
"저걸로 마유주 만들어요! 몽골... 막걸리!”
시내가 한국에 머물던 시절, 이 뽀얀 마유주를 정말 그리워했다고 한다. 너무 그리워서 비슷한 맛을 찾겠다고 한국의 온갖 막걸리를 종종 사 마셨지만 당연히 모두 실패. “전혀 달라요. 완전 달라요.”라고 말하는 시내의 얼굴을 보니 더 궁금해졌다. 마유주가 대체 뭐길래?
마유주는 말 젖을 발효시켜 만든 몽골 전통 술이다. 알코올 도수는 2~3% 정도로 맥주보다도 낮은 편인데, 생김새는 한국의 뽀얀 막걸리와 거의 비슷하다. 맛은 호불호가 강하다. 시큼하고, 톡 쏘고, 살짝 쉰 우유 같기도 하다는데, 사람마다 반응이 가지각색이라고 한다.
유목지역에서는 마유주는 술이라기보다는, 여름철에는 거의 매일 마시는 음료, 즉 일상적 식단에 가깝다. 말 젖을 짜는 시기인 6월 중순~10월 초정도까지 몽골 유목민들은 말 젖을 짜는데, 이때 마유주(전통 아이락)를 제조한다. 이 술은 몽골의 계절을 통째로 담는다.
또, 마유주는 몽골에서 ‘술’이기 전에 환영의 음료에 가깝다. 취하라고 내미는 잔이라기보다는, “어서 와”를 대신하는 첫인사 같은 것. 유네스코와 민속학 자료들에 따르면, 게르에 손님이 오면 가장 먼저 마유주를 내는 것이 관례라고 한다. 특별한 날이라서가 아니라, '손님이 왔다는 사실' 자체가 이유가 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아까도 언급했듯이 마유주는 말젖이 나오는 여름에만 제대로 만들 수 있는 음료라서 가장 풍족한 계절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래서 손님에게 마유주를 내민다는 건, “우리 집은 지금 괜찮다”는 말을 돌려서 전하는 방식처럼 느껴진다.
도수도 2~3% 정도로 낮아 남녀노소 구분 없이 조금씩 나눠 마실 수 있으니, 몽골에서 마유주를 권한다는 건 술을 강요하는 행위가 아니라 당신을 환영한다는 신호에 더 가깝다.
마유주는 대개 나눠 마신다. 큰 그릇 하나를 돌리거나, 주인이 먼저 한 모금 마신 뒤 손님에게 건네는 식이다. 완전히 거절하는 것보다는 한 모금이라도 받아들이거나, 입에 살짝 대는 시늉만 해도 예의로 여겨진다.
시내는 그 자리에서 마유주를 3통이나 샀다. 아니- 저 많은 걸 어떻게 다 먹지? 우린 시내와 기사님을 말렸지만... 그들은 완고했다. 마치 새벽 2시에 3차를 외치는(아무리 집에 가자고 해도 절대 가지 않을) 누군가처럼... 그리고, 마유주를 만드는 나무 교반기 같은 도구를 한참 들여다보며 설명을 해줬다. 통 안에서 말 젖을 계속 저어줘야 발효가 되고, 집집마다 맛도 조금씩 다르다고 했다.
기다림의 미학. 몽골에서는 아무래도 시간이 다르게 흐르는 것 같다. 한국에서는 편의점에서 술 한병 사 오는 데 걸리는 시간은 끽해야 10분 남짓. 그런데, 이곳에서는 술 한 병에도 시간과 손과 기다림을 필요로 한다는 게 생경하게 느껴진다. 물론, 막상 나보고 막걸리 직접 만들면서 살라고 하면 하루도 못 버틸 게 분명하지만.
아무튼, 우리는 게르에 들어와 귀한 그 마유주를 다시 꺼냈다. 시내는 맛이 이상할 수 있으니 일단 조금씩만 마셔보라고 하며, 첫 잔을 아주 시원하게 들이켰고- 나는 조심스럽게 한 모금을 삼켰다.
어라? 맛있는데? 일행들의 반응은 가지각색이었다. 한 모금도 못 마시는 사람들도 있었고, 맛있다면서 연거푸 들이키는 사람도 있었다. 굳이 맛을 설명하자면, 조금 신 요구르트에 물을 타서 묽게 만든... 맛? 확실히 막걸리와는 다르다. 한잔 더 마셔봐야겠다. 꽤 맛있었다! 생각보다 시고, 생각보다 달짝지근한 것 같기도 하고. 초원 한가운데 별밤 아래서 마시고 있으니, ‘맛있어야 할 이유’가 생긴 느낌이기도 하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분명 시작은 마유주였는데, 정신 차려보니 어느새 40도가 넘는 보드카까지 텅텅 비워지기 시작했다. 몽골에서 보드카는 축제든 손님이든, 아니면 그냥 좋다고 이름 붙이고 싶은 날이든, 웬만한 상황을 정리해 주는 만능열쇠 같은 해결책이다.
그날 우리는... (아마) 꽤 취했다.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도 이제는 잘 기억이 나진 않지만, 볼이 빨갛게 상기된 시내의 모습은 아직 생생하다. 알딸딸해진 우리는 난로를 켜고 게르에 드러누워버렸다. 개운하고- 따뜻하고- 잠이 솔솔 온다. 느슨한 하루가 좋았다.
결국 술 때문에 다음 날 아침까지 고생을 한 우리와 달리, 시내는 다음날 새벽에도 멀쩡했다. 마유주 2통과 보드카 1병을 기사님과 단둘이 하루 만에 다 비우고도 안색하나 안 변하고 여느 날처럼 새벽에 일어나 아침을 하는 시내를 보며 난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정말, 엄청난 체력이었다.
사실 그날 밤, 한차례 비가 내렸다. 물기 덜 마른 머리로 게르 안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 있는데, 비가 지붕을 때리는 소리가 꽤 크게 들렸다. 게르는 소리에 솔직하다. 바람 소리도, 비 소리도, 누군가 뒤척이는 소리도 전부 그대로 들린다. 그 소리들 속에서, 나는 잠시 멍하니 누워 있었다.
그러다가 곧, 비가 그쳤다. 정말, 날씨가 하루에도 몇 번씩 변하는구나! 게르 문을 열자, 하늘이 열려 있었다.
오늘도 하루의 마무리는 별이다. 오늘도, 별이 많았다. 이제 이 하늘도 3일 후면 끝이라는 생각에 벌써 아쉬워진다. 몽골에서는 별이 잘 보이는 시기가 있는데, 달이 뜨지 않는 날에 별이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날이 딱 그랬다. 비치는 달빛은 미처 사라지지 못한 비구름에 가려져 있었다. 달은 숨었고, 별은 전부 나왔다.
그리고 다시 새벽. 살을 에는 추위에 잠을 깼다. 이게 맞아? 이틀 전에는 열사병에 걸려 쓰러질 뻔했는데, 오늘은 추워서 앞니를 딱딱 부딪히며 잠에서 깨다니. 핫팩을 두어 개 뜯고도 추위는 가시지 않아서, 결국 경량 패딩까지 입었다.
세상에. 열흘 사이에 사계절을 다 겪고 있다. 이 여행은 사람을 단련시키는 건가, 아니면 놀리는 건가. 그래도 이상하게, 이제는 모든 기억들이 나중엔 다 웃으면서 꺼내질 추억이라는 확신이 든다. 마유주의 시큼한 맛처럼, 지금은 낯설지만 결국은 몽골이라는 이름으로 하나로 묶일 그런 기억들.
추웠고, 취했고, 별은 많았고, 나는 그새 또 씻고 싶었다. 이제는 하루하루 아끼고 싶은 몽골의 밤이 이렇게 또 지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