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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8일 차. 쳉헤르 온천(1)

그 어떤 호화 리조트 보다 행복했던 곳

by 아성조

이틀째 샤워는커녕 세수도 제대로 못하고, 바디 티슈로 찢어 온몸을 닦아대며 연명하고 있다. 머리 감기도 진작에 포기해 버렸다. 꾸질꾸질한 머리를 도저히 풀고 다닐 수가 없어서 양갈래로 나눠 꽁꽁 묶고 베이지색 사파리 모자를 눌러썼다. 절대 귀여운 척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머리카락 봉인에 가까운 의식인데, 하나로 묶어 올리면 머리 둘레가 커져서 모자에 꼈다.

슬픈 등짝- 생존을 위한 양갈래- 나를 살린 사파리 모자-

사슴은 모가지가 길어서 슬프고, 나는 머리통이 커서 울고...




강박적인 털털한 척 병인건지, 원래 성향이 그런 것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어찌 되었든, 나는 자칭타칭 무딘 인간이라고 불려 왔는데- 여행을 떠나면, 아무거나 입에 집어넣어도 우가우가 잘 먹고, 아무 데나 누워도 5분 안에 잠들며, 뭘 봐도 일단 좋다.


그렇기 때문에 여행 계획이라는 것을 대개 짜는 법이 없었고(어딜 가도 좋으니까, 굳이 계획을 짜는 게 시간 낭비라 느껴진다.), 파워 J인 계획적 친구에게 밥이나 커피를 먹이고 모든 계획을 맡겨버리는 만행을 저지른 뒤, 모든 여행지에서 긍정의 리액션을 하는 역할을 부여받는다던가-


아니면 나와 비슷한 '사람 탈을 쓴 오랑우탄 같은 친구'를 하나 꼬셔서 당일 차편을 예약하고- 비가 오면 오히려 좋아를 외치며 우산 갖다 버리고 이천 원짜리 비닐 비옷 입으며 돌아다니기, 식당 줄이 길면 편의점에서 컵라면에 핫바로 한 끼를 때우며 '우가우가 편의점 맛집!' 하다 말고, '그래서 이제 어디 갈래?'로 이어지는 대화 흐름을 깔깔거리면 신나 하기 등을 주로 해왔다.(이건 아무나랑 하면 절대 안 된다. 진심인데, 인연이 끊길 수도 있다.)


그리고 이러한 나를 보며 누군가는 '시원시원하고, 자유롭다'라고 했으며, 또 누군가는 '덜렁대고, 지 멋대로다' 라고 평했다.



하여간에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일종의 자기 고백이자 반성을 하기 위함인데- 요지는 이렇다. 나는 몽골 여행을 떠나기 전까지 이 털털함에 요상하게 묘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어서, 계획이 흐트러지면 괴로워하는 아무개를 보며 '좋은 날에 그거 참 되게 까다롭게 구네'라고 혼자 판단해 버린다던가, 여행지마다 사진을 몇 십장씩 찍으며 보정하고 sns에 올리는 친구 녀석을 보며 '뭘 그렇게까지'라고 생각하기를 서슴지 않았다.


하지만..! 모든 것은 상대적인 것! 몽골에서의 내가 까탈쟁이가 될 줄은 누가 알았으랴!


에라, 나는 정말 몰랐다. 잘 못 먹고- 잘 못 자고- 잘 못 싸면- 사람은 예민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몽골은 상상 이상의 곳이었다. 이곳은 폭우가 내려 갑자기 정전이 일어나면, 전기가 들어오게 고치는 것이 아니라 가게 문을 닫아버린다는 발상의 전환이 가능한 곳이다. 게르에 분명 전기가 있다고 했는데, 그날 전기 공급이 안되면 하루 정도는 랜턴도 없이 '진정한 암흑'에서 살아야 하는 곳이다.


또 샤워 시설이 없는 게르에서는 목욕을 하기 위해서는 미리 받아둔 물을 써야 하는데, 물 위에 날벌레와 풍뎅이들이 동동 떠서 나에게 인사를 하는 곳이다...! 물론 물 자체는 정말 투명하고- 맑고- 깨끗했지만, 도저히 마음이 받아들여지지가 않는.. 그 내면의, 어떤 선이라는 것이, 무너지는 기분을 아는가?

미치도록 아름다웠던 이름모를 들판들
안녕하세요 - 화장실입니다 ^^

그리고 화룡점정으로 화장실! 여행 8일 차- 대 자연의 초원에서 말로만 듣던 푸세식 화장실을 처음 보게 되었다. 우리는 10m 정도 되어 보이는(직접 재 본 것은 아니고, 그 정도로 깊어 보였다는 뜻이다) 구덩이에 두 개의 나무 널빤지가 아슬아슬하게 놓여있는 스릴 넘치는 화장실에 착석하는 것과, 초록빛 초원에서 영롱한 궁뎅이 두 짝을 우산으로 간신히 가린 뒤, 일을 처리하는 것 중에 무엇이 더 나은 선택인지를 진지하게 고뇌했다.




어르헝 폭포 초원 한복판에서 새벽녘에 내리는 폭우와- 날아다니는 벌레들과- 경량 패딩과 핫팩으로 중무장을 해도 몸이 떨리는 추위에 밤새 잠을 설치고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고 나니, 결국- 이러한 결론에 이르렀다.

그 당시의 격한 감정을 그대로 표현하자면 이렇다.


누군가에게는 나도 '이 따위로- 노답-'이었을지도 몰라. 털털하다는 말에 숨어버린 그저 '더러운 인간 1'이었을지도 몰라. 막가파인 내 옆에서 얼마나... 얼마나 괴로웠을까?


그러나 자칭 타칭 단순무식 막가파 본인의 예민함은 피곤함을 이기지 못하고 잠들었고, 깨고 나서 맑개 개인 날씨에 모든 것을 잊었고(자기반성도 저 멀리- 함께 잊었고-), 게르 문을 열고 펼쳐지는 푸른 들판에 또 한 번 감탄했다.


다행이다. 오늘은 온천으로 향한다. 빨리, 너무나, 간절하게 씻고 싶다. 쳉헤르 온천은 몽골의 유명한 유황 온천이고, 오늘 여행자 캠프의 게르 컨디션도 최고라고 했다. 그리고! 끊겼던 전기도 다시 들어올 거다. 죽어가는 컨디션이 드디어 회복이 되는 듯하다.



몽골의 쳉헤르 온천(Chinggis Hot Spring)은 몽골 중부 지역의 대표적인 온천 명소 중 하나로, 몽골 여행 코스에 꼭 포함되어있는 인기가 높은 자연휴양지이다. 몽골어로 쳉헤르는 ‘푸른’이라는 뜻인데, 그 이름답게 침엽수림과 초원 주변에 둘러싸여 있어 멋진 자연경관을 자랑하고 있다. 또한 온천수에도 다양한 미네랄이 함유되어있어, 피로 해소, 피부 질환, 염증, 컨디션 회복 등에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쳉헤르 온천의 온천수를 주변의 다양한 리조트, 게르 캠프 등지에서 펌프를 통해 끌어다 쓰고 있기 때문에 머물고 있는 숙소에서도 노천욕을 즐길 수 있으며, 장소에 따라 일부 시설은 실내 욕조까지 갖추고 있다고 한다.


또한 앞서서도 언급했듯, 쳉헤르 온천은 숲에 둘러싸인 지형이기 때문에 멋진 자연경관과 함께 온천욕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 큰 장점이다. 만약 밤에도 온천을 개방하는 리조트라면 반짝이는 별빛 아래에서 온천을 하는 호사를 누릴 수도 있다.



꼬질꼬질한 몸을 이끌고 리조트에 도착하자마자 수영복과 슬리퍼, 세면도구를 챙기고 온천으로 달려 나갔다. 구름이 낀 흐릿한 날씨에 곧 비가 올 것 같았지만 상관없었다. 씻을 수 있다면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 기세였으니깐.


분명 그랬다. 첫날 숙소부터, 고비 사막, 유목민 게르에 이르기까지 물론 샤워 시설이 불편하긴 했어도 괴롭다까지의 느낌은 아니었는데. 막상 내 눈앞에 뜨뜻한 온천수가 콸콸 시원하게 쏟아져 나오는 해바라기 샤워기를 보고 있자니- 눈이 돌아간다는 느낌이 무엇인지 생생하게 알 것만 같다.


하아- 천국이 별게 있나? 이게 천국이다. 온몸이 시원하다 못해 전기가 오르는 것처럼 짜릿하다. 머리 감고 샤워하는 게 이렇게 행복한 거였다니. 씻는 거 하나로도 이렇게 기쁨을 느낄 수 있다니. 이게 몽골의 매력인가? 그렇다면, 아주 환장할 매력이다.


샤워를 마치고 본격적으로 온천에 들어갔다. 푸른 숲 사이로 보이는 작은 온천탕이 참 운치 있다. 따뜻한 온천수가 온몸에 착 감기는 이 느낌이 정말 좋다. 리조트마다 다르겠지만, 사실 쳉헤르 온천의 시설이 호화롭거나 휘황 찬란한 것은 분명 아니다. 하지만 온천수에 몸을 담그고, 숲을 가만히 바라보던 그 순간만큼은 그 어떤 호화로운 비싼 리조트가 부럽지 않았다.

내가 방문한 쳉헤르 온천 리조트의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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