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를 다 써 달려온 이유
몽골에서 지낸 지 딱 일주일하고 하루가 지났다. 오늘을 기점으로 몽골 여행도 중반을 넘어서고 있다. 벌써 이렇게 지났나? 사막에서 한참 고생할 때는 몰랐는데, 슬슬 아쉬운 마음이 솟아오르기 시작한다.
이곳에서 보낸 순간들만큼, 이상하게도 시간 개념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해가 뜨고, 날이 덥고, 해가 지고, 깜깜하고 오로지 4개의 시간만이 존재하는 기분이 든다.
시시각각을 다투지 않아도 되는 느긋함을 오롯이 즐길 순간이 얼마나 될까? 오늘은 장장 8시간을 차를 타고 가야 하는 '대이동'의 날이지만, 이제 그다지 놀랍지 않다. 조바심 낸다고 시간이 빨리 가지도 않는다. 기다리자! 해가 뜨기 시작해 움직이기 시작하면, 아마도 해가 지기 전에는 도착할 거다.
어르헝 폭포와 대초원을 보기 위한 이동 중 갑자기 비가 미친 듯이 내리기 시작해 현지 로컬 식당에 잠깐 들렀다. 오늘의 메뉴는 양고기 볶음과 쌀밥, 그리고 몽골식 볶음 국수인 '초이왕'! 초이왕은 몽골의 대표적인 볶음면 요리로, 얇게 썬 면을 고기(주로 양고기나 소고기), 양파, 당근 등과 함께 기름에 볶아 만드는 음식이다.
면은 직접 반죽해서 만드는 경우도 많고, 면을 쪄서 넣거나 볶으면서 익히기도 한다. 몽골식 야끼우동이라고 하면 설명이 쉬울 것 같은데, 생각보다 향신료는 강하지 않고 기름지고 심심해 든든한 맛이 났다.
일전에도 말했다시피,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두고도 몽골에서 내 왕성한 식욕은 이상하게 영 힘을 못쓰고 있었다. 그러니까, 내 생에 처음 있는 일이다. 배가... 안고프다. 진짜로!
분명 한국에서였으면 똑같은 메뉴를 줘도 고기에 밥에 볶음면까지 다 먹고도 달달한 디저트를 찾았을 나지만, 이상하게 평소의 절반도 먹지를 못하니 하루가 멀다 하고 눈에 띄게 살이 쭉쭉 빠지고 있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뭐 당연한 수순 같기도, 왜냐면 - 정말 나도 굳이 알리고 싶진 않긴 한데, 벌써 며칠째 화장실 소식이 없다. 내보 내지를 못하니 당연히 먹을 수도 없는 것이다. 하루 종일 책상에 앉아서 공부하고 먹기만 하던 열아홉 수험생 시절 때보다도 이건 더 심각하다.
몽골 여행 때 꼭 필요한 게 뭐냐고 물어본다면, 비상약으로 변비약을 꼭 챙기라고 해야지- 사실 이것도 별 효과가 없긴 했지만. 어쨌든 간에, 몽골 여행 딱 일주일째- 먹기만 하고 싸지를 못하는 슬픈 몸뚱이는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목구멍에 밀어 넣는 음식들을 생애 최초로 거부하고 있었다.
제기랄 거! 이게 바로 몽골 다이어트인 것인가. 한국에서 몇 개월을 죽어라 해도 안되던 다이어트를 일주일 만에 성공시키다니. 맨날 차에 실려 다니느라 운동량도 거의 0에 수렴하는 것까지 생각하면 정말 기적 같은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간, 절대 지치지 않는 먹성을 죽을 때까지 컨트롤하며 양껏 먹지 못할(?) 나의 운명에 얼마나 괴로워했던가, 그에 비해 말라말라 여리여리 종족들을 찬양하는 드-러븐 세상에 얼마나 쭈그러들었던가!
한국에서도 이렇게 배가 고프지 않다면... 입 안에서 터지는 미각의 행복을 더 이상 느낄 수 없다면 이제 그토록 원하던 툭 치면 쓰러질 것 같은 연약연약 여리여리 인간이 되는 건 아마 시간문제일지도...?
그러나, 어째 나는 생각보다 기쁘지가 않았다. 몸의 순환이 안되니 나는 가냘픈 여리여리가 아니고, 눈 밑이 퀭한 비리비리가 되고 있었다. 밥알을 씹어도 모래알 같고, 고기를 먹어도 팡팡 터지는 육즙이 느껴지지 않고, 심지어 디저트를 먹어도 혀가 마비될 것 같은 격한 단맛만 느껴지는 건, 예상외로- 무감각한 슬픔에 가까웠다.
그래, 나는 결국 평생을 괴로워하며 건강한 어깨깡패로 살 팔자인가 보다. 여리 여리고 말라깽이고 다 필요 없고, 화장실 문제를 당장에라도 해결할 수 있다면 영혼-까지 팔 수 있다고 하는 건 솔직히 뻥이지만, 내 통장 잔고에서 한.. 한 오십만 원 정도는 빼서 줄 수 있을 것 같다.
평생 구박만 해왔던 내 식욕을 타지에서 그리워하게 될 줄이야. 가늘어지는 몸통과 팔다리- 그와 함께 떨어져 가는 체력- 그리고 불쌍하게도 무엇인가 차올라 점점 부풀어 오르는 아랫배를 보며 생각했다.
'있을 때- 잘하자!'
끼니를 거르다시피 하는 와중에도 입에 맞아 열심히 마시던 게 있는데 바로, 수태차다. 오늘 점심식사를 위해 방문했던 식당에서도 밥 대신 뽀얀 곰탕 국물 색의 수태차를 한 컵 마셨다.
몽골의 전통차인 수태차는, 우유가 들어간 차라는 뜻으로 몽골 사람들의 일상에서 중요한 음료이다. 따뜻한 차로 몸을 녹이고 배를 채울 수도 있어 하루의 시작이나 식사 대용으로도 자주 마시고, 옛날부터 이동 중일 때도 수태차를 자주 마셨다. 빵이나 만두 같은 탄수화물 음식과도 함께 곁들이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더불어, 에너지와 수분 보충, 체온 유지까지 모두 가능한 음식이기 때문에 손님을 접대할 때 환대한다는 문화적인 의미까지 지니고 있다.
만드는 법도 간단하다. 물에 홍찻잎을 넣고 우유를 첨가해 끓이는 차로, 마지막에는 설탕이나 꿀 대신 소금을 넣어 간을 맞춘다는 것이 밀크티와는 살짝 다르다. 소금으로 간을 하기 때문에 단맛은 거의 없고 짭짤하고 고소한 향이 더 강하다.
담백하고 진한 국물 같아 처음 마시는 사람들에게는 호불호가 갈린다고 하는데, 그래도 홍차나 밀크티를 좋아한다면 무난하게 입맛에 잘 맞을 듯하다.
수천 년 유목의 시간을 지나온 한 잔의 차, 수태차는 그저 음료가 아니라 몽골 사람들의 삶이 녹아든 따뜻한 쉼표였다. 낯설지만 진한 그 맛이, 요즘도 가끔 생각나곤 한다.
푸르공은 다시 오프 로드길을 거침없이 달리기 시작했고, 우리는 차에 실려 미친 듯이 흔들댔다. 이렇게 덜컹거리는 푸르공 안에서도 굳건한 체력을 자랑하는 가이드와 기사님이 존경스러워진다.
푸르공이 흔들흔들 거리는 것을 참다못해 우리는 타의적으로 '기절당했고', 잠깐 정신을 차리고 눈을 뜨면 눈앞에는 말도 안 되게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졌다.
그리고 장장 8시간의 이동 끝에- 우리는, 드디어, 도착했다!
도착한 게르에는 관광객을 여행자 캠프가 없었다. 대신에 유목민이 실제로 생활하고 있는 전통 게르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된다. 그 말인즉슨, 전기도- 샤워 시설도 당연히 없는 태초의 자연에서 하루를 보내게 된다는 뜻이었다.
끝없는 초록과 녹음 위에 지어진 하얀 게르 다섯 채. 삶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 했던가- 사진에서 아름답기만 해 보였던 '저 푸른 초원 위의 그림 같은 집'의 실체는... 내 예상과는 조금 달랐다.
들판과의 낭만적인 하룻밤을 얻기 위해, 감내해야 할 생명체들이 꽤 많았다. 우선, 초록 잔디들 속에 촘촘히 숨어 날아다니던 날벌레 정도는 게르 문을 열어젖혔을 때 펼쳐진 사태에 비하면 꽤 귀여웠던 것 같다. 비록 내 맨발에 벌레들의 촉감이 생생히 느껴지긴 했지만 말이다.
이제는 익숙하다 생각한 게르 침대에 짐을 풀고 누워 기지개를 켜려는 그 찰나, 새까만 풍뎅이도 함께 조용히 내 침대에서 스트레칭을 하고 있을 줄 누가 알았을까? 꾸물꾸물 기어가는 저 작은 생명체를 보고 꽥! 하고 소리를 지르고 싶은데- 소리 지를 힘이- 없다니이- 오호라! 통탄할 일이로다.
그래- 모든 생명은 사랑받아야 마땅한 것이 분명 맞건만, 난 아직 내 베개 밑 풍뎅이까지 사랑할 준비는 안되어 있다고! 풍뎅이와의 동침만은 막기 위해, 그대로 그 녀석을 집어 게르 밖으로 조용히 방생한 뒤 그대로 기절했다.
호들갑을 떨지 않았던 건 에너지 절약 차원에서 참 좋은 선택이었다. 만약 그날, 벌레가 나올 때마다 호들갑을 떨었다면 아마 다음날 여행에 쓸 에너지가 제로에 수렴했을 거다. 잠이라도 한숨 잘라 치면 귀 옆을 맴도는 모기들의 날갯짓이 마치 경고처럼 왱왱거리고, 파리는 게르 안을 날아다니며 숨바꼭질을 해댔다.
게르의 조명 위로 몰려든 날벌레 떼도 좀처럼 사라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불을 켜자마자 어디선가 쏟아지듯 나타나더니 조명 근처를 빙글빙글 맴돌기 시작했다. 빙글 뱅글- 빙글 뱅글! 위이가 이 잉- 에 이에 엥- 묘한 소리까지 가세! 결국 불을 끄고 헤드랜턴만 켜놨더니 이번엔 내 이마 위에 착륙 시도!
오. 마이. 갓. 이쯤 되니 잠이 들기가 약간 무섭다. 잠이 들면 벌레들이 내 얼굴 위를 기어 다니는 것도 꽤 있을법한 시나리오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무사 안녕한 하룻밤을 위해 침낭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마스크와 선글라스로 중무장을 했다. 새벽엔 숨 막혀서 깨더라도 일단은 살고 봐야지 어쩌겠어.
자연과의 공존을 위해 필요한 것은... 낭만보다 무던함이다. 그 어떤 꼬물이들이 내 눈앞에 나타나도, 그러려니- 예뻐하며 넘겨버리는 무던함!
하지만 잃는 것이 있으면 얻는 것도 있는 법. 눈앞에 본 펼쳐진 광경은 지금까지 본 몽골 중에 가장 아름다웠다. 이건 정말, 말도 안 되게 탁 트인 세상이다. 세상이, 이렇게 까지나 넓을 수 있는 건가? 이렇게까지나 푸를 수 있는 건가?
게르 문을 열면 야크가 여유롭게 들판을 거닐고 있었고, 소가 잔디를 뜯고 있다. 강아지도 목줄도 없이 돌아다니며 여유를 즐기고 있다. 와- 이렇게 비현실적인 세상이라니! 3일 차 때 보았던 욜링암의 들판도 정말 놀라웠지만, 이곳과는 비교할 수 없을 것만 같다. 눈앞에 실시간으로 24k 화질로 펼쳐지는 세상에 넋이 나가버렸다.
하지만 놀랄 시간도 아까웠다. 해가 지기 전에 얼른 오늘 갈 어르헝 폭포로 이동할 준비를 했다. 게르에서 어르헝 폭포까지 도로 하나 없는 녹음의 허허벌판이 펼쳐졌다. 이제부터 우리는 40분 정도 현지 유목민과 함께 말을 타고 어르헝 폭포로 갈 것이다. 시내 가이드는 욜링암에서 하지 못한 승마를 드디어 오늘 하게 되었다며 기뻐했다.
초원 저 멀리서 몽골 유목민들의 모습이 보였다. 말안장 위에 자연스럽게 앉아, 고삐를 손에 쥐고 여러 마리의 말들을 데려와, 우리가 차례로 말에 탈 수 있도록 도와주셨다. 무서울 줄 알았는데, 고비사막에서 이미 낙타를 한번 타서 그런지 생각보다 안정적이고, 차르르 윤기 나는 털도 슬쩍 만져보았는데 참 부드럽다.
기사님과 가이드님도 반갑게 유목민들과 인사를 나누더니 금세 말 한 마리씩을 받아 그 위에 올라타셨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듯, 말 위에서 부드럽게 리듬을 타며 앞으로 나아갔다.
이렇게 잘 타신다고? 차를 운전하고 가이드를 해주시는 모습만 보아서 그런지, 정말 깜짝 놀랐다. 시내 가이드는 몽골인들에게 말은 자전거와 같은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어려서부터 말 위에 있고, 5~6살만 되어도 자연스럽고 능숙하게 말을 탄다고 한다. 사람과 동물 사이의 특별한 교감이 이런 것일까?
말을 타는 것뿐만 아니라 여러 마리의 말을 모는 것 또한 굉장히 익숙하다. 흔들리는 말 위에서 그들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이야기를 한다. 칭기즈칸의 후예!라고 하면 너무 뻔하다 하려나- 그렇지만 말 위의 균형과 속도가 본능에 가까워 보이는 모습들에 떠올릴 수밖에 없는 이름이다.
말은 어르헝 폭포를 향해 뚜벅뚜벅 걸었다. 너른 초원의 공기는 맑았고, 선선한 바람은 간간히 얼굴을 스쳤다. 핸드폰 음악도 끄고, 시끄러운 소음도 없는 곳. 간간히 작은 새소리와 바람 소리만 기분 좋게 들려온다. 360도 VR이며 XR이며 체험을 하더라도, 어떤 카메라를 가져와도 이 장면을 오롯이 느낄 수는 없을 거다.
사진 속 사각 프레임이 없는 끝없는 세상. 경계가 없는 초록 세상이 이어지고, 또 이어졌다. 어르헝 폭포로 향하는 길, 모든 것은 거대한 자연의 일부였다. 유목의 땅 몽골에서, 자연과 함께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어렴풋하게 느껴졌다.
드디어 어르헝 폭포에 도착이다! 어르헝 폭포는 몽골 중앙부에 있는 가장 유명하고 아름다운 폭포 중 하나이다. 약 1124km에 이르는 몽골에서 가장 긴 강인 어르헝 강 줄기이기 때문에 어르헝 폭포라 이름 붙여졌는데 높이는 약 23m, 폭은 약 10m 정도이다.
계절별로 볼 수 있는 경관이 다르다는 점이 특이한데 건기에는 물이 줄어 폭포를 거의 볼 수 없다. 대신, 비가 내린 직후 우기에는 수량이 많아져서 가장 굵은 물줄기가 흐르는 멋진 경관을 감상할 수 있다.
또한, 주변은 2004년에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오르혼 계곡 문화 경관이 있어서, 투르크 비문, 고대 수도 카라코룸(몽골 제국의 수도) 등 역사 유적지와 함께 둘러볼 수 있다고 하는데 보통의 관광 프로그램은 시간 관계상 어르헝 폭포에만 들른다.
폭포라 하면 보통 계곡의 상류에서부터 경사로로 물줄기가 이어지는 모습을 상상했는데, 거대한 구덩이에 느닷없이 쏟아져내리는 물들의 기운이 엄청나다. 운이 좋았다. 전날에 비가 왔다고 한다. 굵은 물줄기가 웅장한 소리를 내는 모습에, 입이 떡 벌어진다.
오늘 하루 나를 괴롭혔던 성가신 벌레들도, 꾸르륵 거리는 배도, 까끌한 입맛도 다 괜찮다. 하루 온종일 8시간도 넘게 덜컹거린 시간이 조금도 아깝지 않다.
그래, 이 폭포를 보기 위해 오늘 하루를 또 달려왔구나. 어르헝 폭포의 굉음이 몸 안 이곳저곳을 울리고, 떨어지는 물줄기를 그저 바라보며 서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꽉 차는 하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