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영상’보다 ‘무난한 영상’을 만들게 되는 이유

좋은 기획이 좋은 영상이 되지 않는 이유

by 편집자H



1. 병원은 회사가 아니라는 착각


병원은 병원이지, 회사는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조금만 안쪽으로 들어가보면, 여기도 결국 ‘조직’이더라고요. 단지 의료인이 많은 집단일 뿐, 돌아가는 방식은 일반 회사랑 다를 게 없었어요. 위계도 있고, 정치도 있고, 민감한 관계도 있고요. 그 모든 것 위에 콘텐츠가 얹혀요.


처음에는 몰랐어요. 그냥 신선하고 획기적이고 좋은 걸 만들면 되는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내가 기획한 영상이 ‘조직의 상황’에 따라 바뀌기 시작했어요. 내가 전달하고 싶었던 이야기보다, 내부 사정과 이해관계를 먼저 고려하게 되더라고요. 영상의 흐름, 자막 한 줄, 등장 순서 하나까지도 누군가에겐 민감한 이슈가 될 수 있다는 걸 조금씩 배워갔어요.




2. 순서 하나에도 말 못 할 이유가 있다



어떤 영상을 만들었을 때였어요. 전체적으로 예능적인 요소와 정보 중심의 실용적인 구성으로 기획했고, 시청자 입장에서 봐도 어렵지 않고, 재미있게 접근할 수 있는 콘텐츠였죠.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이 분도 나와야 하지 않겠냐”는 요청이 하나둘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기획 단계엔 없던 인터뷰였고, 원래 취지와는 결이 다른 영상들이 덧붙기 시작했어요. 결국 영상 후반에는 조직 내 여러 고위직의 인터뷰가 연달아 붙게 됐고, 처음 의도했던 흐름과 톤은 완전히 달라졌어요.


그때 확실히 느꼈어요. 콘텐츠는 기획으로 시작되지만, 끝은 항상 구조로 결정된다는 걸요.


(이 외에도 많은 사례가 있지만, 여기까지만 적겠습니다...)


병원 영상은 의료정보나 감동적이고 극적인 스토리만으로 구성되는 게 아니에요. 내부 이해관계까지 설계에 포함되어야, ‘안전하게’ 나갈 수 있는 콘텐츠가 돼요.


이런 경험들이 반복되면서, 어느 순간부터 저도 점점 선을 그을 줄 알게 됐어요. 내부 이해관계를 따져보면서 ‘이건 해도 되겠다’, ‘이건 굳이 안 건드려도 되겠다’는 감각이 생긴 거죠.


직급, 서열, 부서 간 관계, 조직 내 분위기까지 감안해서 자막 한 줄을 다듬게 되는 나 자신을 보며… 이게 콘텐츠 기획일까, 조직 운영일까, 가끔 헷갈리기도 해요.




3. 눈치는 곧 전략이다


중간에 껴서 곤란한 상황에 놓이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았어요. 이 영상이 누구를 위한 건지, 누가 중심이 되는지, 그리고 누가 마지막에 그 화면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할지까지 고려해야 했거든요. 그럴수록 조직의 권력구조를 나름대로 파악하고, 어디에 어떻게 말해야 할지를 계산하게 되더라고요.


스크린샷 2025-08-04 오후 11.04.09.png 명함에 적힌 내 직급


그리고 한 가지 더.

병원이라는 공간은 의료진과 비의료직, 그러니까 전문직과 일반 사무직 사이의 간극이 분명히 존재하는 곳이에요. 어떤 날은 말 한마디 꺼내기 전에 ‘언짢아하시지는 않을까?’ 몇 번은 속으로 계산하게 되고, 어떤 날은 설명을 하면서도 위축되는 기분이 들기도 해요.


가끔은 연락 한 번 드렸을 뿐인데, 짧고 건조한 답변 속에서 ‘내가 뭘 잘못했나?’ 싶어지는 순간도 있었어요.


(그렇다고 모두가 그런 건 아니에요. 오히려 저는 제 일을 했을 뿐인데, 과분할 만큼 감사함을 표현해주시는 분들도 많았거든요. 되려 제가 더 죄송할 정도로 따뜻하게 대해주시는 경우도 있었어요.)


하지만 아무래도 구조적인 위계가 분명한 조직이다 보니, 그런 작은 거리감도 콘텐츠를 만들 때 영향을 줄 수밖에 없더라고요. 결국은 표정, 말투, 속도, 분위기에서 그 사람의 스타일을 읽고, 그에 맞춰 조심스럽게 접근하게 돼요. 기획력보다도 인간관계 스킬이 훨씬 더 많이 쓰이는 순간들이 있어요.




4. 영상은 내가 만드는데, 컨펌은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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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진에게 받은 피드백 일부


컨펌 구조는 참 애매해요. 프로젝트 리드는 조직장이 맡고, 영상은 제가 만들어요. 그런데 컨펌은 또 프로젝트를 리드하시는 분이 직접 받아오시는 경우가 많아요. 그러면 제 존재감은 어디로 가는 걸까요?


그게 늘 아쉬웠어요. 물론 조직 안에선 컨펌을 프로젝트 리더가 직접 받는 게 당연한 보고 체계이기 때문에,


그 흐름을 바꿀 수 없다면 그 안에서 제 존재를 자연스럽게 드러낼 수 있는 방법을 찾는 수밖에 없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저는 일부러 현장에 나가서 얼굴을 비추고, 회의나 촬영 중에 자연스럽게 의견을 드리기도 해요. 병원 홍보팀에서 일 잘하는 ‘영상 담당자’, 'PD'로 성장하려면, 그냥 앉아서 편집만 하는 게 아니라 현장에서 얼굴 비추고, 의견 내고, 이름이든 얼굴이든 기억되게 움직여야 해요.


그래야 “아, 그 영상 만든 분이구나” 하고 기억해 주세요. 솔직히 말하면, 그런 얼굴 한 번 익혀두는 게 나중에 섭외나 협조를 요청할 때 큰 도움이 되기도 해요.


그리고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조직 안에서 저라는 사람을 ‘보이게’ 하는 일은 결국엔 정규직 전환이나, 더 많은 기회와도 연결될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때로는 이런 것까지 계산하며 일해야 하나 싶기도 하지만 그래도 조직 안에서는 ‘익숙함’이 곧 협조의 시작이 되는 것 같아요.




5. 조직 안에서 콘텐츠를 만든다는 것


콘텐츠는 결국 사람이 만든다고들 해요. 그런데 병원에서는 그 '사람'이 개인이라기보단 '조직'이라는 느낌에 더 가까워요. 내가 만든 영상이라도, 누군가의 손을 몇 번은 거쳐야 세상에 나갈 수 있으니까요.


그 과정에서 콘텐츠는 조금씩 달라지기도 해요. 어떤 장면은 빠지고, 어떤 표현은 수정되며, 어떤 흐름은 의도와 다르게 바뀌어요. 때로는 비합리적으로 느껴질 때도 있고, 정말 이게 최선인가 싶은 순간도 생겨요.


하지만 그게 병원이라는 조직의 특성이기도 하다는 걸 이제는 이해해요.


이 안에서 콘텐츠를 만든다는 건, 그 특수한 구조와 흐름을 무시하지 않고 오히려 받아들이며, 그 안에서 가능한 최상의 결과물을 만드는 일이에요. 각자의 입장을 이해하고 조율하면서 ‘모두의 결과물’로 완성해내는 것 말이에요.


오늘도 저는 다양한 입장과 상황을 조율하며, 하나의 콘텐츠를 완성할 준비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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