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포

순간을 얼려서 가두면

by 온점

“다 잊어버렸어 나.”


그녀는 투명한 잔에 담긴 얼음물을 한 모금 입에 물며 이야기했다. 얼음에는 기포가 가득 껴 있었다. 창밖으로 서늘한 바람이 한 물결 즈음이었다. 가을이 천천히 담기고 있음에도 컵의 표면에 물방울이 맺혔다.


“그러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렇구나 네가 담담해서 다행이다.”

“순간의 감정이었지.”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앞으로도 종종 보자.”

“응 좋아.”


그녀는 그와의 짧은 대화를 마치고 전화를 끊었다. 이번에는 잔을 입으로 가져가 얼음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와그작.

얼음이 잘게 씹혔다. 얼음 조각은 입 안의 체온에 의해 빠르게 물로 변했다. 상태 변화는 열을 빨아들여 입 안을 식혔다. 아니 시렸다. 지난 달에 비해 잔의 얼음은 눈에 띄게 느리게 녹았다. 얼음 안 기포가 우주처럼 떠 있었다.


“차가운 물일수록 기포가 많이 생기는 거였나.”


그녀는 혼자 중얼거렸다. 그와의 여름은 항상 얼음이 함께였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너무 덥거나, 너무 습하거나, 너무 비가 많이 와 실내에 틀어박혔던 계절이었다. 두 달 하고도 칠 일이었다.



“우리 무슨 사이야?”


비가 오고 있었다. 마치 빗방울이 연속적으로 이어진 듯 물줄기에 가까운 비였다. 그들이 앉아 있던 패스트푸드점은 계절의 관성에 이끌려 찬바람으로 가득했다. 여름의 막바지였다. 달력을 보면 곧 태풍이 온다는 뉴스가 나올 것만 같았다.


“무슨 뜻이야?”


차가운 콜라를 빨대로 빨아 마시던 그가 되물었다. 사이즈업 된 높은 콜라잔에 든 얼음은 투명했다. 마치 그 액체의 기포를 그것들이 다 뱉기라도 한 듯.


“말 그대로야 우리 무슨 사이냐는 거지.”

그는 당황한 듯 웃었다.

“무슨 사이기는 우리는 우리지.”

“그러니까 너도 나도 고백한 적이 없는데 연인처럼 행동하잖아 우리는.”


빗소리가 창을 뚫고 들렸다. 패스트푸드점 통창에 부딪힌 몇몇 물방울들은 선이 되어 흘러내렸다.

그는 대답했다. 그녀는 대꾸 없이 일어섰다. 그녀는 그와 함께 우산을 쓰고 왔기에 우산이 없었다. 개의치 않는 듯 걸었다. 대기에 비가 내리는 것이 아닌 물 속에 기포 줄기가 내리 꽂히는 듯한 날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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