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괴물' (2006)
현재는 CU로 가득 찬 한강변, 낭만의 시대였던 2005년의 모습은 퍽 달랐다.
소시민들이 운영하는 매점들로 가득했고 그들은 오징어와 맥주를 시키면 손님이 있는 곳까지 배달비 없이 가져다주었다 - 박희봉 씨는 그 매점들 중에서도 장사가 꽤 잘되는 곳의 사장이었다.
아들 둘과 딸 하나 그리고 첫째 아들 강두가 사고 쳐서 낳은 손녀 현서까지 5명이 부족하지만 불행하지는 않은 하루하루를 살고 있었다.
한강변에 괴물이 나타나기 전까진 말이다.
희봉은 첫째 아들 강두에 대한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본디 똑똑하게 태어났으나 본인이 가정에 소홀하여 지금의 멍청이가 되었다는 죄책감.
그런 아픈 손가락인 아들이 눈앞에서 목숨보다 소중한 딸을 잃었다.
그 순간 평범해 보였던 노인 희봉의 눈빛은 언더독 파이터로 변했다 - 손녀딸을 내손으로 되찾아와 사랑하는 자식에게 돌려주겠노라.
아, 왜 굳이 언더독이냐고?
조용히 살 때는 몰랐는데 위기상황에 처하자 이 세상은 돈도 백도 없는 그의 가족에게 매우 가혹하다.
괴물에 접촉한 사람은 바이러스에 전염된다는 헛소문 때문에 끌려간 병원에서 한통의 전화가 울린다.
아빠... 나야! 들려?
괴물에게 끌려간 현서가 살아있다.
모자란 강두가 이 상황을 조리 있게 경찰에게 설명할 수 있을 리 만무하다.
또한 횡설수설하는 그의 말을 제대로 들어주려고 하는 사람도 없다 - 있는 집의 고귀한 사람들에게 같은 일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특별수사팀에 의해 대대적인 수색이 시작되지 않았을까.
여기서 월남전 참전 출신 희봉의 진가가 발휘되기 시작한다.
현서를 직접 찾기 위해 병원에서 탈출을 감행한다.
도주에 성공한 '별 볼 일 없는 계급 출신' 희봉 가족은 언론의 집중포화 공격 대상이 되기 딱이다 - 보균자 가족이 난동을 부리며 개념 없이 도주 중이니 각별히 조심하라는 보도와 함께 현상수배까지 때려 버린다.
이런 상황에서도 아들의 기쁨을 찾아주기 위한 희봉은 매우 냉철하다.
전재산을 현금화해 일단 봉고차를 구했다.
불법무기 암거래 상인과 접촉해 총도 여러 자루 구매했다.
지도를 펴 일사천리로 어디부터 수색할지를 정해 아들 딸들에게 지시한다.
한강변을 수색하던 중 현서를 납치한 놈을 발견했다 - 이건 신이 주신 기회다.
월남전 참전 베테랑은 용감했다.
총을 쏘며 그놈을 추적한다, 괴물도 퍽 당황한 눈치다.
계산을 못하고 마구 쏘다 보니 총알이 동났다.
어리바리 옆을 따라오던 강두에게 총을 달라고 하며 몇 발 남았냐고 물어본다.
한발 남았어, 아빠
그래, 한 발이면 저 괴물 놈을 처단하기 충분하다. 그러고 나서 분명 살아있는 현서를 찾으면 될 거다.
마지막 격발의 순간, 발사가 되지 않는다.
강두가 실수로 총알을 한발 잘못 센 탓이다.
희봉은 마지막을 직감하고 강두를 돌아보며 피곤과 체념이 섞인 오묘한 표정으로 손짓한다.
'어서 가' - 많은 것이 함축된 그의 마지막.
잔뜩 화가 난 괴물은 이때다 하고 꼬리로 그를 감아 땅바닥에 내던진다.
오늘의 언더독 스토리는 새드 엔딩으로 끝났다.
일이 이렇게 된 데에는 누구의 탓이 클까.
평화로운 서울에 갑자기 나타난 괴물의 탓일까.
희봉 가족 같은 소시민들의 목소리에는 관심이 없었던 사회의 탓일까.
아니면, 결정적인 순간까지도 멍청함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아버지를 위험에 빠뜨린 강두의 탓일까.
한 가지를 꼽긴 어려우나 그것 하나만은 확실하다.
내 새끼의 슬픔을 본 평범하디 평범한 아버지는 그의 책임을 끝까지 다했다고.
P.S
박희봉을 연기한 변희봉 배우는 2023년 9월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났고 그의 빈소에 송강호, 박해일, 배두나는 직접 빈소를 찾거나 화환을 보냈다.
18년 전 한강 둔치를 헤매던 가족들이 한 자리에 모여 그의 마지막을 기렸다.
R.I.P
<사진 출처 - 다음 영화 & 쿠팡 플레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