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 드라마 속 삶보다 힘든 이유는 클리셰가 없기 때문이다. 드라마에선 대개 주인공이 역경을 딛고 이겨내면 행복이 찾아온다. 하지만 현생에서는 행복한 날이 언제 올지 알 길이 없다. '열심히 살다 보면 해 뜰 날이 오겠지.' 막연한 희망을 붙잡으며 살아갈 뿐이다.
3년 전 파혼을 겪고 나서 나는 스스로에게 주문처럼 말했다. '지금보다 밑으로 내려갈 일은 없을 거야. 이미 충분히 바닥이니까. 최악을 경험했으니까 이제 좋을 일들만 있을 거야. 이번에도 잘 이겨낼 거야. 이 또한 지나갈 거야.'
자기 최면을 걸면서 꿋꿋하게 살아가던 어느 날 누군가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언니, 근데 인생에 굴곡 없는 사람들이 더 많아. 파혼이나 가족의 불화는 대부분 경험하지 않는 일들이잖아.” 그 친구의 말에 답할 길이 없었다.
'그러게. 나에겐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걸까.'
1. '서약서 보내드립니다'
헤어진 지 한 달 만에 전 남자친구였던 Y에게서 메일을 한 통 받았다. 메일을 열어 보니 '발단 / 결과 / 다짐 / 다짐이 가능한 배경'으로 나뉘어 적힌 문서가 첨부되어 있었다.
발단과 결과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내 이름은 A로 하겠다.)
나는 사귀는 동안 A가 얼마나 잘해주는지 몰랐으며 금방 다른 여자를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함.
하지만 소개팅을 해도 다들 마음에 들지 않았고, A가 잘해줬던 것에 익숙해져서 다른 사람을 만나기 더 어려워짐.
그 사이 A에게 남자친구가 생겼고, 그걸 알고 나서 나는 감정 조절에 실패함.
내가 A에게 감정적으로 대응하면서 상황이 악순환이 됨.
나는 A를 매일 떠올리며 불면에 시달리고 있음.
Y는 본인과 다시 재회한다면 연락을 잘할 것이며, 두 달에 한 번씩 깜짝 선물을 해줄 것이며, 1년에 한 번은 해외여행을 가겠다는 약속을 적었다. 결혼을 약속한다면 주택과 차량을 제공하겠다는 내용도 적혀있었다. 문서의 마지막에는 Y의 주민등록번호가 주소가 적혀있었다.
주민번호까지나 적으면서 이런 말도 안 되는 문서를 진지하게 적은 Y가 무서웠다. 나는 이런 사람과 1년을 만났던 건가. Y와 함께했던 시간들이 아까웠다. 내 인생의 한 페이지였던 시간을 망쳐버린 Y가 원망스러웠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니 사람 보는 눈이 없던 내 잘못이 컸다. 물론 지금도 그렇게 사람을 잘 판단하는 건 아니다.
2. '아들이 헤어지고 많이 힘들어했어요.'
전 남자친구의 어머님한테 문자를 받은 적도 있다. 헤어진 지 4~5개월 정도 지나고 나서였다.
A 씨 안녕하세요. B 엄마입니다.
아들이 헤어지고 많이 힘들어했어요. 저와 한 번 만났으면 해요.
예쁘고 착한 A 씨와 성실하고 배려를 잘하는 B가 잘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연락 주세요.
그리고 문자 한 통이 더 왔다.
B에게는 비밀로 해주세요.
문자를 받자마자 너무 놀라서 육성으로 '헉' 소리를 냈던 기억이 난다. 나는 최대한 예의 있게 회신했고, 어머님에게 이런 답장이 왔다.
하느님이 보시기에 합당한 배우자를 만날 수 있도록 기도한 응답이 A 씨라 생각되어 마음이 아프네요.
마음이 열리면 기회를 만들어요.
나는 답장을 하지 않았다.
'살다 보니 이런 일도 있구나, 어찌 됐든 헤어지기 잘했다.
그런데 나에겐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걸까.'
요즘 말로 '럭키비키'라는 말이 있다. 나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결국 다 나에게 좋으려고 일어난 일들이라는 거다. 아이돌 '아이브' 멤버 장원영의 초긍정적인 사고를 두고 한 말이다.
에피소드가 많으니까 생각도 많고, 쓰고 싶은 글도 많다. 주변에서 털어놓는 고민거리에 해줄 이야기도 많다. 내가 이러려고 이런 일들을 겪었나 보다.
Y와의 이별 회고 연관 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