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가고 싶다가도 머물고 싶어지는

호주여행 9일 차

by 나우히어



지금 나는 아니 우리 가족은 호주 골드코스트의 고급 리조트에 있다. 그런데 행복하지가 않다. 어딘지 모르게 서로 특히 나와 남편은 불편한 상태이다. 누구 하나 겉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서로 알고 있다.


인천에서 시드니행 비행기를 타고 온 지 9일째인 오늘이다. 인천에서 시드니까지 10시간 비행기를 타고 와서 시드니 도심에서 3박, 달링하버에서 1박 후 호주 국내선을 타고 브리즈번으로 와서 2박 후 어제 골드코스트의 마지막 숙소로 왔다. 여기서 어제 포함 3박을 한 후, 화요일 아침에 다시 비행기를 10시간 타고 인천으로 돌아가야 한다.


아직 우리에게는 꼬박 이틀의 여정이 더 남았는데, 오늘 낮에 어딘지 심상치 않은 무거운 기운이 우리를 둘러싼 느낌이었다.


재작년에 딸과 나는 발리 한 달 살이를 했었지만, 세 식구가 자는 시간 포함 온전히 하루 24시간을 함께 하는 여정은 이번이 가장 길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일까, 여행 후반부여서 아무래도 다들 지치기도 한 탓이겠지만, 며칠 전에도 살짝 위기가 왔었지만 자연스럽게 넘어갔었는데, 오늘 다시 한번 더 위기가 찾아왔다.


Breakfast in cheraton grand resort in Goldcoast


조식 먹으며 오늘의 일정을 의논해 보았는데, 나는 세계(?)에서 가장 길다는 골드코스트 해변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스카이포인트를 가고 싶었고, 남편과 딸은 그다지 원하지 않는 눈치였다. 그럼 물놀이를 좋아하는 두 사람이니 나는 전망대를 다녀오고 두 사람은 어제 오는 길에 보았던 빠지를 가는 걸로 합의를 보았다.


내 나름대로는 각자의 취향을 반영한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생각했고 남편도 동의했는데, 오전에 수영장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고 온 남편이 티를 안내지만 티가 팍팍 나게 짜증을 내는 것이었다.


이제 정말 연애 기간 포함 20년을 봐온 사람이기에 잠깐의 표정이나 짧은 한마디만으로도 파악할 수 있다. 지금 어딘가에 무엇 때문에 아니면 나에게 짜증이나 불만이 있는 상태라는 것을.


부부마다 이런 상황에서 해결 방법이 다르겠지만, 우리는 보통 2가지인 것 같다. 주로 내가 가끔 남편이 술을 먹고 술김에 좀 화를 내거나 아니면 주저리주저리 해서 풀거나, 아니면 각자 조금 떨어져서 기분을 정리할 시간을 갖거나.


적도 너머 타지에서 대낮부터 꽐라가 될 정도로 개념이 없지는 않았기에 어차피 각자의 시간을 보내기로 했으니 그 시간 동안 풀리기를 바라며 나는 전망대에 오르고 남편과 딸은 빠지로 향했다.



나는 남들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힘들지 않은 척한다. 동정받고 싶지 않으니까. 행복하고 싶고, 좋은 삶을 살고 싶으니까. 나는 슬프지 않고 싶다. 아니, 내가 슬퍼하고 싶은 것들에 대해서만 슬프고 싶다. 하지만 인생은 그런 식으로 굴러가는 게 아닌 모양이다. ㅡ <오늘 너무 슬픔>, 멀리사 브로더


사실 내가 조금만 더 의존적이거나 소위 말하는 여성적이었다면 이런 상황에서 남편에게 징징대거나 아양을 떨거나 아니면 잔소리를 해서 기분을 풀든 대판 싸우든 그런 상황으로 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런 성격이 되지 못해서 말 그대로 이런 상황에 대해 남편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힘들지 않은 척을 의연한 척을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하는 것 같다. 이러한 나의 성격이, 대처방법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잘 모르겠지만, 바꾸기가 쉽지 않기는 하다.


Skypoint in Goldcoast, Australia


그렇게 나는 홀로 77층 전망대에 올라 골드코스트를 내려다보고 인증샷을 몇 개 건진 후, 다시 지상으로 내려와 한 시간 거리를 걸어 리조트로 돌아왔다. 반 정도 왔을 때부터는 신발을 벗고 해변의 모래사장을 밟으며 가끔 쎈 파도에 밀려오는 바닷물에 발도 담궈가며 지는 해에 길게 늘어진 내 그림자도 찍어가며 뚜벅뚜벅 걸어왔다.


바다 때문에 나는 평화로운 중에도 불안증에 시달린다. 달은 나를 흠잡고 있을 게 뻔하다. 개들은 진실을 안다. 아기들은 내 속내를 꿰뚫어 본다. 자연적인 것, 순수한 것은 다 마찬가지다. 그 모든 것이 나를 관찰하고 평가한다. ㅡ <오늘 너무 슬픔>, 멀리사 브로더


나는 땅을 밟으며 걷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다. 특히, 파도 소리를 들으며, 청량한 바람을 맞으며,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온전히 나의 템포로 걷다 보니 자연스럽게 기분이 조금은 나아지기도 했다. 말 그대로 마음이 평화로워지는 기분이랄까. 하지만 한편, 걱정이 되기도 했다. 물놀이를 마친 남편이 계속 짜증을 내면 나는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할까. 사근사근한 성격이 아닌 나는 분명히 남편의 짜증에 냉정하게 반응을 할 테고 그럼 남은 여행 기간이 매우 불편해질 텐데.



평화로운 중에도 불안증에 시달리며 숙소 근처로 와서 잠시 그늘에 앉아 숨을 고른 후 방으로 들어오니 남편이 먼저 씻고 있고 딸은 드라마를 보고 있었다.


어땠어? 물어보니 엄청 재밌었어~하는 걸 보니 그래도 물놀이는 나쁘지 않았나 보다.


씻고 나온 남편에게 먼저 말을 건넸다.


어땠어?

응~재밌었어~


역시 내 예상이 맞았다. 어느 정도는 누그러진 것이다. 자기도 생각이 있다면, 뭐 그래야지 어쩌겠는가. 아직 우리는 집에 도착하기까지 거의 50시간을 더 붙어있어야 하는데.


불안장애가 있는 사람에게는 평범한 일상보다 드라마틱한 상황이 어떤 의미에서는 더 편안하게 느껴진다. 드라마틱한 상황에서는 세상이 내 불안에 맞장구쳐 주니까. 그런 상황이 벌어지지 않으면 평범한 일상을 드라마틱하게 바꾸게 된다. ㅡ <오늘 너무 슬픔>, 멀리사 브로더



요즘 들어 내가 어느 정도 수면장애가 있음을 인정하게 되는데, 그 원인으로는 외할머니-엄마로 이어지는 유전적인 영향뿐 아니라 분명히 심리적인 요인도 있을 것이다. 내 마음의 밑바닥에 있는 우울감이나 슬픔, 분노 또는 변태적인 생각들을 싸잡아 불안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도 평범한 일상보다 드라마틱한 상황을 추구하는 사람인 것은 확실하다. 나에게 드라마틱한 상황이란 바로 (해외) 여행이다.



1년에 두어 번 해외를 나오는 것으로 나는 주변인들에게 행복한 결혼생활을 유지하는 코스프레를 하고, 나 자신에게도 만족스러운 삶을 잘 살고 있다는 코스프레를 하고 있는 건 아닌지. 그렇다 해도 이 코스프레를 그만둘 수는 없다. 이 드라마틱한 상황마저 없다면 무슨 낙으로 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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