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마크에서 한국인으로 살아가기
글을 쓰겠다고 생각한 후, 필명에 대한 고민을 자연스럽게 이어갔다. 이내 결정한 것은 본명인 민경을 필명으로 쓰자는 것이었다.
내가 닉네임을 따로 쓰지 않는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오래 쓰고 있는 닉네임도 있고, 네이버 카페나 게임 등 휘발성이 강한 공간에서는 그때그때 새로운 닉네임을 쉽게 만들어 쓰기도 한다.
이번 주부터 덴마크 어학원을 다시 다니기 시작했다. 7월에 잠깐 이주 정도 다녔다가 그만두고 새롭게 시작한 것으로, 첫 시간에는 자신의 이름과 국적을 덴마크어로 소개하는 시간을 가진다.
"Jeg hedder 민경"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면, 스펠링이 어떻게 되는지, 발음이 어떠한지 여러 번 묻는 질문을 받는다. 대부분은 민쿙 민쾅 민큐엉 등 어떻게든 대답해 주는 편이라 그냥 내가 알아듣고 말지 뭐. 하고 넘기는 편인데, 이번 어학원 선생님은 나에게 "민"이라고 불러도 되는지 양해를 구했다. 그 순간 주목이 되는 것이 싫어서 알았다고 넘겼지만, 집에 돌아온 후에도 내내 울적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왜 그 순간에 나를 지키지 못한 걸까. 서툴고 발음이 틀려도 내 이름을 불러달라고 말할 순 없었을까.
이어진 두 번째 클래스에서는 내 이름을 계속 불러달라고 했고, 이제 클래스 메이트들과 선생님은 우스꽝스럽긴 하지만, 대체로 내 이름을 불러준다.
해외에서는 이름을 불리는 것부터 자신을 지키는 거라고 비약해서 생각될 때가 있다.
어릴 때는 내 이름이 퍽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세나, 루리 같은 이름이 좀 더 예쁘고 귀여워 보였고, 하다못해 유진이나 민아 같은 이름도 좋았다. 내 이름을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성토할 때면 민경이라는 이름도 흔한데, 성도 흔하다는 투정을 함께 늘어놓았다. 내 성씨는 한국인의 반이 가지고 있는 이름인 김. 합쳐서 김민경이라는 이름은 원고지에 쓸 때 꽉 차는 가득 찬 사각형 같은 느낌이라 보기에도, 불리기에도 투박하다고 느껴졌다.
"나 이름 바꿔주면 안 돼? 외국은 경이라는 발음을 하기 힘들대. 조수미도 원래 조수경이었는데 이름 바꾼 거래."
중학교 때는 이런 논리를 내세워 어머니에게 넌지시 개명의 의사를 전하기도 했다. 네가 해외로 나갈 일이 있으면 생각해 보자고 묵살당했지만. (그런데 어머니... 어쩌다 보니 해외로 나오게 되었네요...)
20대 초반 잠깐 미국을 갔을 때는 Mia Kim이라는 영어 이름을 만들기도 했다. 기껏해야 쓸 일은 스타벅스에 적힐 일 밖에 없었는데-그리고 짧게 사귄 친구들이 불러줄 때.- 아직 영어 사대주의가 남아있었어서 그런가. 어쩐지 새로운 힘을 얻고 새로운 인격이 된 것 마냥 신났었다. 여전히 내 이름은 촌스럽고 투박한, 내가 싫어하는 자아를 덕지덕지 붙여놓은 무언가였다.
나는 현재의 남편을 처음 만났을 때도 Mia Kim이라고 자신을 소개했었다. 곧 본명을 말해주게 되었지만. 그렇게 스스로의 이름에 자신이 없던 내가 내 이름을 사랑하게 되었던 건, 관계가 깊어지고 어느 나라에서 함께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며 국제커플 커뮤니티를 들락거릴 때 봤던 한 네티즌의 댓글 덕분이었다.
"저는 내 성 Kim이 좋아요. 누가 들어도 한국인인 걸 알 수 있으니까요."
해외 나오면 누구나 애국자가 된다고 하지 않던가? 나는 안 그래도 시키지도 않았는데 한국사 검정시험 1급을 딴 역사 오타쿠였고, 국제연애를 하면서는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이 더욱 심화되던 와중이었다.
한국에 있을 때는 너무 흔해서 발에 차이는 성은 해외로 나가면 내 정체성을 증명하는 이름표가 되기도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을 바꾸자 나는 내 이름이 좋아졌다.
요즘 나는 내 이름을 고집하게 된다. 그것이 나 스스로를 드러내는 자리일 때는 더더욱. 같은 아시안 계열이어로 상대적으로 서양에서 불리기 편한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부러울 때도 있지만, 그래도 민경이라는 다소 어려운 발음이 오히려 나를 더 강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다. 내가 영어도 쓰고 덴마크어도 써주면 너도 내 이름 정도는 불러줘야 하는 거 아냐? 하는 마음가짐으로. 그리고 어차피 나도 영어와 덴마크어를 마스터한다고 해도, 원어민처럼 완벽하게 문장을 구사하고 발음할 리는 없으니 -아직도 남편 풀네임 발음 못한다- 모두가 서로의 실수에 너그러워지되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좋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