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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마사람 Oct 08. 2021

그들에게도 추억, 기억, 꿈이 있다

<진이, 지니> 서평

정유정 작가의 책은 대부분 읽었다. 다소 어두운 이야기들이었기 때문에, 이 책 역시 그런 분위기의 책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고, 몰입감이 대단했다.

 

<진이,지니>는 주인공과 주인공의 페르소나가 4일 동안 겪는 이야기다. 이 두 개체(?)를 돕는 남성도 있다. 주인공과 남성은 공유하는 것이 있다. 타인의 행불행에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이랄까...?

 

작가는 말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고. 그러니 살아있는 동안 온힘을 다해 살자고.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 책의 결말이 모두에게 해피엔딩이라고 생각한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스스로 선택한 주인공, 제자리를 찾은 페르소나, 삶의 가치를 깨달은 남성까지.

 

하지만 나는 조금 다른 시선에 꽂혀 책을 읽은 것 같다.

 

‘모성’ ‘생명’

 

어느 순간부터 동물원이나 수족관에 가는 게 불편했다. 특히 개인이 운영하는 작은 동물원에 가면, 작은 케이지 안에서 멍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동물을 보는 게 불편했다. 그냥 막연하게 미안했다. 우리나라의 기후 조건과 다른 곳에서 살던 동물들이 과연 잘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지금까지의 나는 철장 속 그들의 모습이 가여웠을 뿐, 그들이 느꼈을 공포감이나 당황스러움은 알지 못했다. 안다고 해도 생각만 하고 금방 잊어버렸겠지. 철창 안의 그들이 봤을 때, 나 역시 자식에게 한 번이라도 동물을 더 바라보게 만드는 ‘인간 부모’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추억, 기억, 꿈은 인간만이 누리는 것이 아니다. 동물도 자신만의 행복한 기억을 간직하며 살고, 가족과 사랑을 속삭인다. 동물도 두려움을 느낄 땐 이 상황에서 나의 생사를 좌우하는 대상이 누구인지도 명확히 알고 있다. 걔네들은 그 멀고 먼 서식지에서 이곳까지 어떤 과정을 거쳐서 왔을까?

 

어미와 멀어질 때 절절함을 느끼던 동물, 인위적인 환경에서 출산한 스트레스로 자식을 증오하게 된 동물, 어미에게 버려졌지만 인간의 사랑과 돌봄으로 다시 태어나 새 생명을 맞이한 동물. 원초적 수준의 감정을 공유할 수 있는 우리는 똑같은 생명체임을 느꼈다.

 

우리는 그들을 존중하고 경외할 줄 알아야 한다.

 

 

[본문에서]

나는 고개를 빼고 슬그머니 창문을 올려다봤다. 그림자는 좀 전과 똑같은 자세로, 같은 자리에 서 있었다. 부스스한 머리털, 그늘이 져 검은 구멍처럼 보이는 커다란 눈, 넓은 어깨.... 팬이었다. 아기를 품에 안은 채 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부터 저렇게 서 있었을까? 나는 몸을 일으키고 창가로 다가갔다. 팬은 미동도 없이 나를 마주 봤다. 울컥, 그리움이 밀려왔다. 저 아이의 등을 쓰다듬으며 ‘사랑해, 팬’이라고 속삭이던 때가 불과 며칠 전이었는데.

 

팬은 아기를 안고 창문 앞으로 다가왔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몸을 옆으로 돌리고 섰다. 동시에 품에 안긴 아기의 얼굴이 내 정면으로 돌아왔다. 나는 숨을 멈추고 바라봤다. 검고 가느다란 머리털과 쪼글쪼글하게 주름진 살굿빛 얼굴을, 젖꼭지를 찾아 어미의 가슴을 비비는 작고 귀여운 입술을, 갓 삶이 시작된 존재를, 그 눈부시고 연약한 모습을.

 

미친 소리 같지만, 나는 팬이 나를 알아봤다고 생각한다. 내게 자신의 아기를 보여주려고 창문 앞으로 다가왔다고 믿는다. 나를 내려다보는 팬의 얼굴에는 자부심이 어려 있었다. 내 아기야, 라고 말하는 눈이었다. 목이 아파왔다. 뱃속이 뜨거웠다. 이 느낌을 오래도록 기억하려고, 나는 눈을 감았다. 윗입술을 들어 올려 유치랑에 입을 맞췄다.

 

‘아기를 보여줘서 고마워, 팬’

 

팬은 창문에서 멀어졌다. 팬은 내게 아기만 보여준 게 아니었다. 주어진 일을 해낸 자신의 용기를 보여주었다. 삶에 대한 태도를 보여 주었다. 더하여 내가 아직 살아 있다는 걸 일깨웠다. 살아 있는 한, 할 수 있는 일을 다 해야 한다는 것도. 그것이 삶이 내리는 유일한 명령이라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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