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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리터 Jun 25. 2022

치료가 필요할 정도로 심각한 '운동 중독증'입니다.

흥, 웃기는 소리. 발 다쳤으니 당분간은 상체 위주로 조질게.

만약 지금 나에게 단 한번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초능력이 주어진다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 바로 전날 참가한 풋살 대회에서 나는 한 세 골쯤 넣겠지 기대했었건만, 허무하게도 단 한 골도 넣지 못해 독기가 아주 오를 대로 바짝 올랐던, 지난주 일요일 풋살 정기 훈련날이었다.


왠지 실제 상황보다 다소 드라마틱하게 각색된 것 같긴 하지만 내 기억으로는 대략 이랬다. 우리 팀이 계속 밀리고 있던 차에 자칭 공격수인 내가 거의 최후방 수비 위치까지 내려와 상대편 공격을 끊어냈다. 완전 절호의 공격 찬스! 앞에 나가 있는 팀원에게 공을 크로스 패스한 뒤 재빠르게 반대편 사이드로 질주해 역습에 가담했다. 이 악물고 뛰었건만 서로 사인이 안 맞아서 아쉽게 골문 코 앞에서 패스 미스. 그래도 여기까지 뚫고 올라왔는데 '해보자 해보자 후회하지 말고'의 심정으로 저 멀리 라인 밖으로 데굴데굴 굴러가는 공을 쫓아갔다. 이 공을 끝까지 살리는 나, 제법 포기를 모르는 의지의 스포츠인 같아서 살짝 취할 뻔했던 건 안 비밀. 여유 있게 공을 세워두려고 오른발로 사뿐히 점프~ 그리고 '악!' 외마디 비명과 함께 필드 한복판에 큰절 자세로 주저앉아 한동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일부러 오버하는 줄 알고 몇몇 팀원들은 웃음을 터뜨렸고 놀리려고 다가왔다. 장난이었으면 참 좋았을 텐데, 그 자세 그대로 부축임을 받아 택시 타고 집까지 실려왔다. 그렇게 됐다.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제발 그 공에 미련을 버리라고, 이 경기 진다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그때의 나에게 소리치고 싶다.




살짝 접질린 거겠지, 물리치료받으면 금방 낫겠지 하는 생각으로 다음날 동네 정형외과를 찾았다. "또 축구하다 다쳤어요?" 작년에도 풋살 하다 삐어서 왔던 게 그제야 생각났다. 재작년에도 한번 넘어져서 반깁스를 했었더랬지. 아아, 한 번 실망한 사이는 다시 신뢰를 회복하기 어렵고, 한 번 삔 인대는 다시 짱짱해지기 어렵다고 했던가. 어릴 때 스케이트보드 타다 자빠져 다쳤는데 제대로 치료를 못 받았던 게 아직까지도 내 발목을 잡고 있었다. 근데 이번에는 손상 범위가 커서 이미 발이 너무 많이 부은 상태고, 회복이 오래 걸릴 것 같다고 한다. 진료 내내 친절했던 선생님이 마지막에는 세상 단호한 목소리로 그랬다. "한 4주 봅니다. 당분간 운동은 할 생각도 마세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반깁스를 질질 끌며 병원을 나오는데 주책맞게 눈물이 핑 돌아서 괜히 마스크를 눈 밑까지 올려 썼다. 어쩜 이렇게 하늘은 더 파란 건지, 오늘따라 왜 바람은 또 완벽한지. 저녁에 뛰기 딱 좋은 이 계절에 무려 4주씩이나 되는 운동 금지령은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요즘 주 2회 풋살은 물론, 주 4회 크로스핏, 주 1회 농구, 주 2회 러닝을 하는 낙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리터럴리 '운동 광인'이기 때문이다. 솔직히 진료 보고 나오는 길에 이제 발을 다쳤으니 하체 안 쓰고 할 수 있는 상체 운동이 뭐가 있더라부터 떠올렸는데, 상체 운동할 생각도 하지 말라는 풋살팀 동료의 톡을 받고 뜨끔했다. 몇 주 빨리 운동하려다 영영 운동 못하게 될 수도 있겠구나, 꼼짝 말고 다 낫기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겠구나 싶더라. 그렇게 운동 중독자에게도 낯선 새로운 종목, 바로 '운동 없는 나날들 견뎌내기' 운동이 시작됐다.


..라고 생각했지만 그러면 안 됐다




운동 금지 1일 차에 즉각적으로 나타난 금단 현상은 염려증이었다. 남들 눈에 어떻게 보이는지는 별로 안 궁금하고, 솔직히 나는 요즘 내 몸에 스스로 꽤나 만족하고 있었다. 2년째 꾸준한 유산소 운동과 식단으로 10kg 가까이 체중을 감량하고, 올해부터는 크로스핏으로 팔, 다리, 코어에 근육을 조금씩 붙여가며 몸을 만들어가던 중이었다. 울끈불끈 솟은 근육이 눈에 띌 때면 내심 뿌듯했다. 태어나 처음으로 느껴 보는, 탄탄한 몸을 소유한다는 감각. 그 짜릿함을 이제 막 좀 즐기려던 차였는데, 이게 어떻게 키워온 근육인데.. 몇 주 운동을 못하면 지난 몇 년 간의 노력이 다 물거품처럼 사라져 있을까 봐, 딱히 그립지 않은 예전의 내 모습으로 돌아가버릴까 봐 두렵고 속상했다.


근손실 염려증을 타파할 수 있는 건 운동뿐인데 운동을 할 수가 없으니 이미지 트레이닝이라도 해야 했다. 쓸데없이 상상력이 풍부하고 과할 정도로 잡생각이 많은 MBTI N형 인간 적성에 딱 맞았다. 가만히 누워 두 눈을 감으면 세상 어디든 갈 수 있고, 거기서 스포츠 영화 몇 편 분량의 서사가 뚝딱 완성된다. 요 며칠 사이 상상 속에서 가장 많이 찾은 곳은 단연 풋살장이었다. 만약 공이 이렇게 오는 상황이면 내가 어디 서서 받아야 할까? 수비한테 이 방향이 막히면 어떻게 뚫어야 할까? 우리 팀이 이렇게 이렇게 서 있을 때 어디로 패스를 주는 게 좋을까? 꽤 구체적인 시나리오 수백 개가 머릿속에서 서로 치고 나오고, 상상 속의 나는 그 어려운 걸 다 해내고 골 넣고 멀티골 넣고 해트트릭하고 세리머니도 하고 아주 난리가 났다. 그러다 보면 새벽 3시, 4시.. 분명 1시 전에 불 끄고 잘 준비를 하고 침대에 누웠는데 잠은 올 생각을 안 한다. 운동을 못하면 불면증에 시달릴 수도 있다는 건 정말 꿈에도 몰랐다.


가슴은 답답하고 몸은 아프고 잠은  자는  악순환을 어떻게든 끊어버려야겠다고 생각한  다행히도 금방 위험 신호를 감지했기 때문이다. 작은 자극에도 지나치게 예민하게 반응하고, 아무 이유 없이 갑자기 울컥하는 감정이 올라오고, 자기 전에 내일이 오는  딱히 기대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스치는 . 그건 내가 아주  알고 있는 우울증 전조 증상이었다. 과거의 내가 운동을 하게 되면서 마음이 괴로웠던 시기를 극복한  맞지만, 운동을 못한다고 해서 다시 그때로 돌아가서는  된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그날부로 운동 과몰입에서 조금씩 빠져나오려 하고 있다. 답답할  동네를 산책하며 몸을 움직이고 바람도 쐬고, 심심하면 책을 읽거나 좋아했던 드라마를 다시 찾아보는  다른 것들에 몰입하는 시간을 가졌다. 지나고 보니 어쩔  없는 실수로 파열된 오른발 인대보다 굳이 내가 혼자서 꾸역꾸역 만들어낸 염려증, 불면증, 우울증 같은  훨씬  아팠다.  이상 '당분간 운동 못하는 ' 불쌍히 여기지 않기로 했다. 신체 부상에 굳이 마음 부상까지 더할 필요는 없으니까. 아픔 뒤에  단단해진다는  이런 건가.  제법 성숙한 멘탈의 스포츠인 같아서 살짝  자신에게 취할 뻔했는데, 그러다 방심해서 다치면  되니까 자제해야겠다. 그래도 시간을 되돌릴  있다면  접질리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긴 하다. 몸이 근질거리는  사실이거든. 하루빨리 운동 복귀할  있도록 오늘도 열심히 얼음찜질을 해본다.


사뭇 다른 지난 달(좌)과 이번 달(우)의 운동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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