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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리터 Mar 26. 2019

죄송한데 제가 영화를 안 좋아해서요

100일 글쓰기 #영화

"영화 좋아하세요?"

"아, 아뇨"

"아.. 그러시구나"

"..."


소개팅에서 빠지지 않는 뻔한 단골 질문, 그리고 나에겐 가장 곤란한 질문이다. 상대방도 전혀 예상 못한 대답이었을 테다. 세상에 영화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니.. 저런 낭만 없는 사람이 다 있나! 뭐 이렇게 생각하려나.


거짓말을 못하는 성격이라, 차마 영화 보는 걸 좋아한다고 대답할 수가 없다. 잘 모르는 영화 얘기를 아는 척하면서 대화를 이어나갈 자신이 없다. 만약 이 사람과 잘돼서 몇 번 더 만나면 분명 다음 코스는 영화 보러 가자고 할 텐데, 그것도 곤란하다. 그 시간에 나는 영화보다는 상대방을 더 알아갔으면 마음에.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사실 끝도 없이 댈 수 있다. 가장 큰 이유는 무섭고, 잔인하고, 폭력적인 걸 잘 못 보기 때문이다. 액션·공포·스릴러 빼고 보면 되지 않냐고? 얼마 전, 안 보면 한국 사람 아니라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보러 간 <극한직업>도 너무 폭력적이어서 한참 동안 눈 감고 귀 막고 있었다. 당신이 상상하는 것보다 나는 훨씬 더 여리다. 왜 내 돈 주고 가서 정신적인 고통을 받아야 하는지. 너무 아프고 괴로웠다.


멜로·드라마 장르는 폭력과는 거리가 있으니 괜찮지 않냐고? 영화화할 만한 스토리가 되려면 모름지기 고난과 역경이 있어야 하는데, 사실 그걸 보고 있는 것조차도 힘들다. 왜 주인공의 삶은 저렇게까지 각박하고 암울해야 해? 악역은 왜 저렇게까지 못돼야 해? 아직 전개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 울고 있다. 쓸데없이 과몰입을 해서 누가 보면 거의 세상 고통을 나 혼자 짊어진 것 같아 보일 거다.


그럼 정말 아무 고민·걱정 없이 내내 웃기만 하면 되는 코미디 영화를 보면 되지 않겠냐고? 미안한데 그건 또 시간 낭비 같아서 싫다. 2시간이나 투자했는데 영화가 주는 메시지도 없고, 나한테 남는 것도 잘 없지 않나. 웃음이 필요할 땐 유튜브만 있어도 얼마든지 박장대소하며 스트레스를 풀 수 있다.

 



그래서 영화를 자주 안 본다. 나를 진짜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왜 사람들이 영화를 좋아하는지도 너무 잘 알겠고, 영화라는 취미가 삶을 다채롭게 만들어주는 것도 알겠지만. 그냥 나와는 잘 안 맞으니까 나는 다른 데에서 즐거움과 감동을 찾으려는 거고.


그래도 어디 가서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인생영화 하나쯤은 있다. 무섭거나 폭력적이지도 않고, 너무 슬프거나 고난이 심하지도 않고, 웃으면서 볼 수 있지만 굵직한 메시지와 여운이 남는 영화. 내가 아는 유일한 그런 영화. 누가 뭐래도, 조금 부끄러워도 내 인생 영화는 <주토피아>다.


하나뿐인 나의 인생 영화를 비웃지 않을 사람, 첫 만남에 영화 얘기를 하지 않고도 대화를 이어갈 수 있는 사람, 영화 안 보고 서로에게 좀 더 집중할 수 있는 데이트를 좋아하는 사람을 만날 거야. 어디엔가 있겠지.


그래도 돌이켜 보면 좋았던 영화 몇 편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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