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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우 Aug 04. 2021

아무튼, 혼술 : 고퀄 혼술의 정수와 합리화의 기쁨

망원동 1 식당

 오늘은 투자를 좀 했다. 오후 6시 30분에 문을 여는 망원동 1 식당에 오기 위해 퇴근 후 회사 앞에서 모범택시의 문을 겁 없이 열었다. 1 식당은 오늘이 처음은 아니나 처음이 되는 곳이다. 혼자서 방문이 그렇다는 얘기다. 다양한 시간대에 방문했으나, 꽤나 여러 번 발길을 돌린 곳이다. 그만큼 핫한 곳이었다. 오늘은 가성비 좋은 곳과 분위기 좋은 곳 중에서 저울질하다 여기로 왔다. 가성비 좋은 여의도는 다음에 방문해야겠다.


  망원동 구석진 곳에 위치한 1 식당은 전반적인 분위기나 컨셉이 맘에 들어서 집으로 돌아기는 길이 매우 멀지만 찾아오고 말았다.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건 바 자리에 있는 독서등이다. 마치 대학 도서관의 호젓한 열람실처럼 바 테이블 자리에 스탠드가 하나씩 배치되어 있다. 스타일 있게 살짝 레트로 느낌이 나는 그런 조명이다. 야트막한 옐로우 톤의 색감이 내 자리를 비춰준다. 조용히 집중하며 앉아있기 좋다. 책을 꺼내 읽어보고 싶지만 아직 그러기에는 주변의 눈길을 감당할 자신이 없다. 나는 음주 독서 주의자인 것이다. 책은 못 읽겠지만 그 은은한 조명 아래에서 공부하듯이 상세하게 설명된 메뉴판을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메뉴판을 열의에 찬 눈빛으로 응시한다. 오늘의 사시미에 표시된 게 눈길을 끈다. 메뉴판 맨 위에는 오늘 제공 가능한 횟감의 재료가 체크 표시로 표기되어 있다. 물고기 픽토그램으로 만든 가독성이 좋은 독서자 중심의 메뉴다. 이런 세심한 센스, 감사합니다. 역시 계절의 강자 방어가 있다. 하지만 살짝 고민해 본다. 갈수록 연약해지는 나의 위장 때문에 회와 소주의 조합은 언제나 복통을 동반한다. 다른 따뜻한 메뉴를 빠른 눈으로 스캔한다. 하지만 방어 가마살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이 집의 최고가의 메뉴다. 오늘 호강하기로 마음먹고 왔으니 과감히 주문한다. '과감함'이란 단어를 사용하는 건 지금 이 메뉴가 마지막 메뉴가 아님을 이미 본능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수차례의 번민을 통해 추가 메뉴를....


 

 이자카야의 바에 앉아 있으므로 요리하시는 분의 분주한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아직 이른 시간이지만 밀려드는 손님들의 주문으로 주방은 몹시도 분주하다. 내가 주문한 메뉴가 어디쯤에서 어떻게 조리되고 있는지 기분 좋은 마음과 눈빛으로 찾아본다. 아마 저기 흘깃 보이는 도마 위의 것들이 나의 것인가. 색깔이 좋구나. 그런데 너무 양이 많았나 몇 점 덜어내시는 주인장(으로 보이는 셰프님)의 모습이 조금 야속한 생각이 든다.


 그래도 기대에 부풀어 가마살을 기다리며 다른 테이블을 살짝 둘러본다. 여기도 동질감을 느낄 수 있는 혼자 오신 분은 없는 듯하다. 이런 곳에 혼자 오지 않으면 어디를 가신단 말인가, 라며 내가 굳이 이상한 부류가 아님을 강조해 본다. 식당 이름이 1 식당인데 1인이 오는 경우는 흔치 않은 듯하다. 나만해도 몇 번을 시도하다 이제야 오게 됐으니 말이다. 혼자오고 싶어도 들어오는 것이 기나긴 웨이팅 탓에 들어오기가 쉽지 않을 수도 있겠다.



 안주 나오는 속도를 보니 띄엄띄엄 주문했다가는 일찍 자리를 뜨지 못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빨리 나오기를 바라는 건 아니에요. 이런 느림이 대접받는 기분을 느끼게 해 줘서 저는 좋아요. 다시 한번 재빨리 메뉴를 스캔한다. 도미 머리 구이가 있구나, 그런데 22. 천 원이구나. 혼자 먹기엔 만만치 않은 가격이다. 그래도 시켜보자. 자주는 오지 못할 거 같으니. 오늘은 호기를 좀 더 부려봐도 되겠지. 첫 번째 메뉴가 나오기도 전에 추가 메뉴를 주문을 고민한다. 오랜 혼술의 경험상, 마음 편히 혼자 마시려면 안주가 비는 시간 없이 짧고 임팩트 있게 먹고 마시는 것이 좋다. 더구나 이런 인기 있는 곳에서 혼자 앉아서 2시간 넘게 있으면 괜한 민폐의 감정이 생기기 때문이다.


 가마살 나왔다. 가지런히 정리된 부위별 플레이팅도 기대한 비주얼이다. 1인분 분량은 아니었지만(나에게는 1인분) 각 부위별로 3점 이상씩 나오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칼집도 잘 들어가 있어서 보기만 해도 식감이 느껴졌다. 후다닥 와사비 없이 간장만으로 한 점 먹어본다. 아, 씹히는 맛이 굉장히 좋다. 아직 방어가 이른가 싶기도 했는데. 적당히 기름이 오른 딱 좋은 식감이다. 쫄깃함이 공존하는 그런 맛이다.  


 그런데, 접시를 내주실 때 하시는 말씀이 회 밑의 가마는 다 드시면 구워드린단다. 도미 머리 구이 주문하려던 생각을 급하게 속으로 밀어 넣었다. 이런 서비스가 있는 줄 몰랐네. 그래서 추가 주문을 고민할 때 도미 머리 구이와 끝까지 경합을 벌이던 후토마끼로 주문 변경! 후토마끼도 22. 천 원. 오늘 좀 써봅니다. 깊숙이 넣어둔 카드를.


 제주에 살 때 언제나 11월이 되면 방어 축제에 갔었다. 모슬포항 주변에서 큰 파도를 맞으며 잘 자란 대방어를 저렴한 가격에 하루 종일 맛볼 수 있었기 때문에  방어 축제는 지금도 특별한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그러니 방어에는 제주 출신의 한라산을 마실 수밖에 없다. 방어의 최고 페어링은 한라한 21도가 되는 것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싸늘한 해풍이 불어오는 대낮이면 더욱 좋겠지만, 여기는 망원동이다. 이 정도만 해도 감사하다. 회와 함께 구이를 먹는 것만으로도.


  차마 책을 꺼내어 읽을 수 없으니 독서등 아래에서 메뉴판만 계속 쳐다보게 된다. 그런데, 봄베이 사파이어 하이볼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하이볼에 문외한이기도 하지만 봄베이 사파이어 하이볼은 처음 보게 됐다. 그래서 역시 주문한다. 순식간에 나왔다. 생각지도 못했는데 하이볼 전용 잔에 담겨 나왔다. 이런 하이볼 전용 잔이 존재한다는 것도 신기하다. 봄베이 사파이어라는 푸른색 문구가 로고와 함께 새겨진 멋진 잔이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하이볼로 유명한 위스키들은 대부분 전용 하이볼 잔이 있었다. 물론 이 사실을 알게 되기까지는 일 년 가까운 시간이 걸렸지만.


 여하튼 얼음이 잔뜩 들어간 하이볼은 시원했다. 한라산이 조금 남아 있긴 했어도 메뉴와는 조금 안어울릴듯하여 후토마끼를 위해 하이볼을 주문했던 것이다. 봄베이 사파이어가 시원하고 맛있지만  이미 한라산을 한 병 가까이 받아들인 내 입에는 물 같았다. 후토마끼와 함께 먹으려고 시킨 거니 물이면 차라리 낫지, 하는 생각을 한다.  재차 합리화를 하고 있다.



 하지만, 인간이 '합리화'라는 속성이 없었다면 얼마나 자책하며 세상을 살아갈 것인가. 모범적인 삶에도 가끔 일탈이 필요하며, 방탕한 삶에도 때론 성찰이 필요하다. '합리화'는 자기 위안의 도구로 우리의 팍팍한 삶에 잠시의 유예를 선사할 수도 있다. 그래서 '합리화'라는 단어가 의지박약의 나약한 정신상태를 대변하는 것에는 결사반대다. 우리는 가끔 '합리화'를 즐길 필요가 있다. 오히려 권장해야 할지도 모른다. 물론 가끔이라는 전제가 필요하지만.




 그래,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가마살은 참 맛있다. 살짝 칼집을 넣고 얇게 썰어낸 것이 입에 착착 감겼다. 제주도에서 그렇게 방어를 섭렵했는데 정작 가마살은 처음이다. 역시 새로운 탐험에는 이런 미식의 보상이 따르는 것이다, 라며 '합리화'카드를 한번 더 써본다. 가마살의 맛이, 내 입에 참 맞는 이 맛이, 무슨 맛인가. 아, 그렇다. 관자와 비슷한 식감이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맛이구나. 관자 러버로 살고 있는 나로서는 감동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그런 맛인 것이다.


  

 남들은 2~3명이 먹는 모둠 사시미와 가마구이, 실하기가 이루 말할 데 없는 후토마끼까지 다 먹어가고 있다. 이런 정도의 바에 와서 이렇게까지 포만감을 가지는 건 쉽지 않은데, 그 어려운걸 방금 해냈나 보다.



가마구이. 아, 이것도 좋네요. 배불러도 젓가락은 내려놓기 아쉬운 맛입니다. 이제 만족감을 품고 종반전을  맞이할 수 있겠습니다. 여기 1 식당은 혼술 하는 사람한테는 좋은 곳이 분명하다. 음식과 공간의 퀄리티라는 것이 함께 보장되는 느낌이다. 혼술 하는 사람은 다 나름의 이유가 있다. 얕은 의미에서든 심각한 의미에서든. 혼자만의 시간을 오롯이 즐기고 존중받고 싶은 그런 마음이 있다. 그 어떤 의미에서도 1식당은 만족을 줄 수 있는 곳인 것 같다.



오늘도 한라산 조금 남길 수 있겠네요. 건강을 위한 '합리화', 마지막으로 한 번 날리고 갑니다.


2잔은 족히 남았는걸요.


'합리화'를 '절제'로 포장하며



오늘도 잘 먹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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