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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ersona Apr 07. 2024

사유(思惟)의 종착역(終着驛)

- 인생이란?

 요즈음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폭우 강설 지진 등의 뉴스를 접할 때마다 예상 밖의 뭔가 모를 두려움이 나약한 마음에 공포감으로 밀려오는 느낌이다. 이제 세계는 코로나19 팬데믹 시대가 지났음에도 기후의 불확실성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다. 이러한 기후의 위기에서도 나는 솔직히 나에게 어떤 일이 생길 것인가를 생각지 않고 글쓰기에도 손을 내려놓고 무사무려(無思無慮)로 지내고 있다. 

 이러한 생활에 절필까지도 생각하던 차에 원고 청탁이 왔다. 늘 졸필임에도 잡지에 실려주기에 원고를 보냈다. 항상 책을 받아보는 기쁨에 나의 카페, 블로그에 발표된 글을 올리는 것이 무료한 일상의 즐거움이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며칠, 아니 원고를 보낼 때까지 글감에 대해 힘들게 생각하고 고민에 빠지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 와중에도 이런 사실을 딛고 일어서게 하는 원고 청탁은 ‘무사무려’의 무료한 생활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활력소가 된다.

 만물이 소생하며 삶의 기운이 율동으로 넘치는 소망의 계절, 푸르른 창공 아래 너울대는 파도와 작열하는 태양, 구름과 단풍이 만나 두둥실 떠가다 숨는 듯 나타나는 낙엽의 계절, 하얀 눈이 소복하게 내려 마음을 정결케 하며 한 해의 마무리와 새해를 예고해 주는 계절. 우리나라의 사계절이 뚜렷하고 자연이 가져다주는 아름다움은 따로 설명이 필요치 않다. 늘 선조들이 자연을 사랑하고 벗하는 모습이 부럽기 때문이다. 항상 자연인이 되고 싶다기보다 그 자연을 노래하고 흠모하기를 원하기에… 언제나 자연과 더불어 인간의 존재와 삶의 의미를 생각하곤 한다.

 오랜 벗이 갑작스럽게 대학병원에 입원했다. 일상생활에서도 호흡기를 사용한다며 건강에 불편함을 호소했던 사십여 년 가까이 지내던 친구다. 내가 그의 건강과 호흡기에 연관해 비슷한 불편함(나는 COPD(만성폐쇄성폐질환) 환자)을 잘 알기에 깊은 위로와 관심을 가졌던 친구다. 지금은 시설 좋은 요양병원에서 치료 잘 받고 삶과 투쟁 중이다. 쾌유를 빌며 병원을 다녀온 뒤 내 마음 쓸쓸하기에 그지없다. 아내와 둘이 삶과 죽음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누던 중 ‘사전연명의료의향서(환자가 원할 경우, 연명의료를 중단·거부할 수 있도록 하는 법이 2018년 2월부터 본격 시행에 들어갔다. 그에 따라 연명의료를 거부한다는 본인의 의사를, 이를 통해 미리 문서로 남길 수 있게 됨)’에 함께 동의해 작성했던 기억이 생각났다. 

 인생의 종착역을 달려 저승으로 여행을 떠난 벗들이 있다. 저승으로 소풍을 가려는 친우들도 있다. 청춘의 아름다운 모습을 간직하고 이승에서 기쁘고 즐거운 생활을 노래하던 그들이었는데… “인생은 헛되고 헛되도다.” 하듯이 인생이 쓸쓸하고 무상함을 느끼는 계절이다. 이제 칠십 중반을 넘어가는 나이가 된다. 부질없는 생각에 잡념이 인다. 잡념이 부질없다기보다 삶과 죽음이란 단어가 늘 친근하다. 인간의 존재는 죽음을 향해 있는 삶이 아닐까? 언젠가는 죽는 인생!

 2월의 겨울이 입춘이 지나도 아침은 영하의 날씨다. 오후는 맑은 날씨처럼 외출을 유혹한다. 외출해서 공원을 걷다 보면 맑게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눈과 귀가 감지한다. 미세 먼지, 초미세먼지가 호흡을 가쁘게 한다. 나에게는 치명적인 먼지다. 오히려 비 오는 날이 난 좋다. 먼지가 깨끗이 씻기듯 사라지기에… 마음의 잡념도 사라지는 느낌이다. 계절의 변화에 적응하며 살아온 겨울엔 오히려 따뜻한 호주가 그리워진다. 십여 년 넘게 겨울이면 날아다녔던 호주의 여름. 이제는 딸내미 가족이 한국에 오간다. 아내와 함께 둘만이 지내는 생활이다. 되도록 외출하지 않는 겨울 생활은 그립고 외로운 침묵이다. 침묵한 마음은 가끔 조용한 죽음을 연상하게 만든다.

 오래전 국민학교 시절, 설날 아침. 우리 가족은 외할머니댁으로 세배 인사를 드리러 갔다. 설날 아침 떡국을 먹던 식탁 앞에서 외할머니가 조용히 눈을 감으셨다. 믿기지 않은 죽음을 처음 보았다. 나를 무척 귀여워해 주시고 사랑해 주신 외할머니. 죽음이란 단어가 생소했던 나는 눈물도 흐르지 않았고 그냥 멍한 상태로 있었다. 시간이 지나 봉안을 모신 절에 따라갔다. 외할머니에게 절하라기에 엎드려 보니 외할머니 사진만 있음을 보고 난 울기 시작했다. 눈물은 샘처럼 솟고 엄청나게 울기 시작한 기억이 떠올랐다. 그 후 난 나의 아버지 어머니 임종을 일부러 피했다. 죽음 앞에 불안과 공포가 두려웠다. 공황장애가 나를 괴롭혔다.

 조용한 죽음은 아름다운 것? 존재와 죽음은 우리를 철학자로 만든다. 생각이 없는 사람도 어느 시점에서는 반드시 궁금해한다. 죽으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죽음은 두려워할 일인가?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지? 각자 나름대로 인생살이에 죽음이란 단어가 스며드는 순간이 있다. 염세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처럼 듣는 법에 익숙해지려고 감사와 연민에 빠진다. 스스로 자신을 더 잘 알기 위한 시도를 한 몽테뉴는 죽음이 언제든 우리를 찾아올 수 있음을 상기시킨다. “우리는 언제나 장화를 신고 즉시 떠날 준비를 해야만 한다.” 

 Well-Dying 전문가이고 동료 수필가인 그의 작품집 ≪오늘이 내 생의 마지막일지라도≫라는 책(“잘 보낸 하루가 행복한 잠을 가져오듯이, 잘 보낸 삶은 행복한 죽음을 가져온다.”라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문구로 장식한)을 다시 손에 잡았다. 

‘아름다운 삶과 행복한 죽음 맞이가 삶의 의미를 깊이 깨닫게 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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