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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로운 명절생활, 키워드는'배려'

내가 하기 싫은 일은 남에게도 시키지 마라! 사람은 도구 아닌 목적이다.

곧 추석이다.

코로나19라는 대역병 속에서 맞는 두 번째 추석이다.

사회적 거리두기 일부 완화로 명절에 백신 접종 완료인 사람 4명이면, 모두 8명까지 가족은 집에서 만날 수 있다.

뉴스를 보았다.

며느리들이 명절에만 사회적 거리두기를 완화한 것에 불만이 많다는 것이다.

작년처럼 시댁에 안 갔으면 한다는 말이다.

한 번 경험해보니 너무나도 좋았던 것이다.

자신의 부모님을 만나기 싫어하는 아내의 마음을 아들들은 이해한다.

너무나도 슬픈 현실이다.

우리나라만 유독 이렇다.

그 이유는 뭘까?

가족 모두가 행복한 명절은 불가능한 걸까?

이번 글의 주제다!

제목에 '슬기로운 명절 생활'이라고 썼다. 그리고 그 핵심 키워드로 '배려'라는 단어를 제시했다.

'배려'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도와주거나 보살펴 주려고 마음을 씀'이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도와주거나 보살펴 주려는 마음'이라는 말이 자꾸 배려의 대상에게 뭔가를 주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배려'라는 말이 부담되게 느껴진다.

즉 '슬기로운 명절 생활'이라고 써놓고 '배려'라고 말하니 이 글 처음부터 읽은 사람들은, 그럼 며느리들이 시댁에 가기 싫어하니 도와주고 보살펴 주는 마음으로 시댁에 가지 말라고 해야 하나?!라고 대부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면 명절은 부모와 자식이 떨어져서 지내는 것이 약자 며느리들을 위한 '배려'가 되는 걸까?

뭔가 모순되고 아이러니하게 느껴진다. 


명절은 가족과 함께 보내는 특별한 날인데 왜? 우리나라는 유독 모두가 경제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그리고 정신적으로도 힘들어해야 하나?


바로 핵심은 며느리와 시댁 간에 문제가 아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문제다.

이 글의 작은 제목, 다음 내용만 지키면 아무런 문제 없이 행복한 명절, 더 나아가 가족, 직장, 어떤 곳에서도 모두가 부담 없는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고, 그 배려로 더 나은 세상이 될 수 있다. 

이것은 필자가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수천 년 전부터 전해온 사상, 철학, 종교의 가르침이다.


내가 하기 싫은 일은 남에게도 시키지 마라! 
사람은 도구가 아닌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본인이 하기 싫은 일은 남에게도 시켜선 안된다는 것이다.

시댁에 가서 며느리들이 해야 하는 당연한 일들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과연 누가 언제부터 만든 룰(rule)인가?

회사라면 정당한 대가를 받고 하기 싫은 일이라도 억지로 한다.

그렇다면 며느리들이 시댁 가서 일하는 것에 대해서 시부모가 물질적으로 보상해주면 될 것 아닌가?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걸 바라고 시댁에 가서 하기 싫은 일을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오죽하면 우스개 소리지만 웃지 못할 이야기로, 없는 땅을 있는 척하며 죽는 그날까지 자식들을 속이며 억지 효도를 받으며 생을 마감한 부모의 이야기를 만들어냈을까?

그럼 돈 없는 부모는 억지 효도도 못 받는다는 말이지 않는가?


제사, 명절, 차례, 성묘 , 효, 예 등등... 모두.....

진정성이 없다면 아무 의미 없는 말이다.

마음(진정성)이 없는 곳에는 뜻(의미)도 없다. 

내가 조상을 생각하는 마음이 있으려면 좋은 기억이 있어야 한다.

앞서 말한 '제사, 명절, 차례, 성묘, 효, 예 등등' 진정성 없는 형식은 겉치레다.


뭣이 중한지 알아야 한다.

살아있는 가족들 함께 재미있게 지내라고 쉬는 명절이지, 죽은 조상 위해 산 사람들 고생시키기 위해서 있는 것이 명절이 아니다.

혹자는 그런 고생도 훗날 지나면 다 추억이 된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그런 사람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맞고 자란 자식이 학대 부모 된다'라는 말이다.

고생한 기억이 추억이 된다는 말은 다 헛소리다.

지나고 나니 일부 지금 고생하지 않는 자신의 모습에서 잠시 행복을 느낄 뿐, 만약 그 고생이 계속 지속되고 대물림되거나, 그 고생 때문에 병을 얻거나, 불구가 되거나, 누군가 목숨을 잃거나, 정신적 트라우마를 겪는다면, 사고이고 사건이며 범죄일 수 있다.

관습적 관성적 무사안일주의, 전체주의적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

개인의 행복이 없으면 전체의 행복도 없다는 것을 명심했으면 한다.


풍습, 관례, 예의, 효도, 유교사상 다 좋은 말이다.
하지만 그 이전에 '사람'보다 더 중요한 '도리'는 없다.


유교사상의 대가 공자의 일화에도 나온다.

한 집의 노비가 도망가서 공자 뒤에 숨는 일이 있었다.

노비 주인이 와서 공자에게 노비를 내놓을 것을 청했다.

공자는 무슨 일인지 물었다.

그는 풍습에 따라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노비를 순장하려고 준비하던 중 저 노비가 도망갔다고 말했다.

공자는 그럼 자식의 도리로서 너도 효를 다하기 위해 함께 무덤에 묻혀야 하지 않는가? 라며 되물었다.

그러니 노비 주인이 말하길, 

"그건 억지요. 주인이 죽으면 그 노비를 함께 묻는 순장은 예전부터 내려온 관습이고, 이제까지 내려온 고대의 예이니 이를 기본 도리로써 지켜야 하오."라고 말했다.

이때 공자가 말하길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欲勿施於人)"이라고 했다.

즉 자기가 하기 싫은 일을 남에게 하도록 시켜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역지사지하면 배려의 참뜻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위의 이야기는 영화 '공자'에서도 나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글로 축약하다 보니 상세 내용은 다를 수 있으나, 결국 핵심은 같다.

이는 비단 공자의 가르침만이 아니다.


철학에서는 칸트, 교회에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화에도 있다.


철학자 칸트의 정언명령이다.

“격률이, 동시에 누구에게나 통용되는가 어떤가를 생각하여 모든 사람이 해야 할 일이기 때문에 그것을 한다.”,  글귀만 보면 어렵다. 하지만 그 풀이의 내용을 천천히 찾아보면 결국 '본인이 하기 싫은 일은 남한테도 시키지 마라'라는 말이다. 덧붙여 정언명령에는 사람을 목적으로 다루어야지 도구로 취급해선 안된다는 뜻도 담겨있다. 즉 이 모두가 '사람'의 지위, 신분, 관계를 떠나 존중함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를 따르는 한 랍비의 일화로 엿볼 수 있다.

한 유명한 랍비가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었다.

이때 한 이방인이 당신이 말하는 예수의 말씀, 율법을 내가 한 다리를 들고 있는 동안 설명한다면 개종을 하겠다고 도발을 하였다. 그러자 그 랍비는 주저 없이 말했다.

"네가 싫어하는 일을 이웃에게 하지도 시키지도 말라. 이것이 율법이 말하는 전부다. 나머지는 그 해석이다."라고 말이다. 


이 가르침들은 비단 명절을 맞이하며, 시부모가 며느리에게 뭘 시키지 마라라고 해석한 것만은 아니다.

자식도 부모에게 마치 자신의 재산을 맡겨놓은 것처럼, 뭘 물려달라, 무엇을 해달라 요구해서 안된다는 것이다. 인간사 아무리 가까운 부모 자식 간에도 인간의 도리로써 지켜야 할 당연하고 기본적인 선의가 있다.


그 선의는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자식의 바람을 다 들어주는 무조건적 사랑도 아니고,

부모의 말이라면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자식의 효도도 아니다.


사람대 사람으로서 내가 하기 싫어하거나 부담되는 일을 그 어느 누구에게도 바라거나 요구하거나 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출처: 한국일보 그래픽: 김경진 기자

이번 명절에는 어떤 가족이 오던 안 오던, 고맙게도 함께한다면 당장이라도 함께 식사하는 자리가 먹는 사람 따로, 준비하는 사람 따로가 아닌 모두가 함께 준비하며, 어느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 식탁에서 함께 오손도손 웃으면서 지내며,  자신이 뭔가 부족하다거나 하다못해 물이라도 마시고 싶다면, 그 누구에게도 시키지 말고 스스로 필요로 하는 것을 찾고 취하는, 진정 남을 시키지 않고 역지사지하며 배려하는 명절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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