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 정혜공주 무덤과 정효공주 무덤
이 글은 다소 단순화되고 간략화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문제를 가지고
이렇게 한탄하며 욕하는 글이 모 인터넷 커뮤니티 화제글에 올라왔다.
https://www.fmkorea.com/best/8009421839
이 문제, 정확하게는 정효공주와 정혜공주 묘의 의미에 대해 현행 역사과 교육과정과 임용시험 수준의 지식을 바탕으로 이야기해 보도록 하겠다.
발해의 역사는 간략화해 보면 다음과 같다.
고구려의 멸망 이후, 고구려 유민들은 여러 갈래로 쪼개지게 된다. 그중 발해 건국에 중요한 두 축을 나눠서 살펴보자면 기존 발해의 영역에 남아 자신들의 삶을 영위해 가던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특히 당과 신라의 지배력이 닿지 않은 고구려 동북부에 말갈과 함께 살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한 축은 멀리는 당나라 내지부터 가깝게는 요서의 영주로 끌려간 사람들이다. 이들은 주로 평양이나 요동 중심지에 살던 지배층으로 추정된다.
영주로 끌려갔던 대조영은 거란 이진충의 영주 공격을 계기로 탈출한다. 유민을 이끌고 동쪽으로 이동하며 천문령에서 당군을 물리치고 동모산(돈화시 추정)에 정착했다. 잔존한 다수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규합해 국가를 세우니 그것이 바로 발해[건국 당시 국호는 진국]이다.
건국 초 발해는 당과 마찰을 겪었고 이는 2대 무왕 때 크게 두드러진다. 흑수말갈의 복속 문제를 두고 발해는 당과 외교적 긴장관계를 겪었다. 무왕은 이에 당의 등주(산둥반도)를 선제 공격하였다. 당은 가만히 있지 않았고, 신라와 연합해 발해 공격을 시도하기까지 할 만큼 양국의 관계는 격렬한 긴장상태를 유지했다.
또한 시기가 명확하지는 않지만, 무왕 시기에 발해의 수도가 중경(화룡시 추정)으로 이동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문왕의 즉위 전(734년), 돌궐 비가가한이 사망하며 돌궐이 붕괴되고 거란 역시 당에 복속된다. 그래서인지 문왕의 발해는 당과 친선관계를 맺고 내정을 정비하는데 주력한다. 지방 행정제도와 중앙 관료제도를 정비하였고, 중경 -> 상경(영안시) -> 동경(훈춘시 추정)으로 수도를 여러 번 옮기기도 했다.
그리고 문왕의 둘째 딸이 정혜공주요, 넷째 딸이 정효공주니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 되시겠다.
대한민국의 학교 교육은 교과서가 아니라 교육과정 상의 "성취기준"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많이들 착각하는데, 교과서 그 자체는 교육과정이 아니라 일개 교재에 불과하다.
18개정 역사과 교육과정 중, 발해에서 중점적으로 강조하는 부분은 아래 3가지 요소이다.
1. 발해 성립의 역사적 의의 -> 고구려의 계승 + 신라와 함께 민족사를 이어감
2. 발해의 통치 체제의 변화 양상
3. 발해의 문화 내용과 대외 교류 양상 -> 특히 삼국 문화 계승과 교류사적 관점에서
그리고 정효공주 묘와 정혜공주 묘는 이를 매우 잘 보여주는 유적이다.
앞서 설명한 내용들을 간략히 정리하자.
1. 대조영(고왕)은 고구려 유민을 규합해 동모산(돈화시 추정)에서 발해를 세웠다.
2. 무왕 시기에는 당과 긴장관계였으며 수도는 동모산(돈화시 추정) -> 중경(화룡시 추정)이다.
3. 문왕 시기에는 당과 친선관계였으며 수도는 중경(화룡시 추정) -> 상경(영안시) -> 동경(훈춘시 추정)이다.
발해 최초의 수도였던 동모산 일대는 고구려의 색깔이 짙게 남아있을 것이고 대조영의 무덤 역시 이 인근에 있을 가능성이 크다. 중경 일대는 고구려의 색채와 당의 색채가 융합돼 나타날 것이며, 상경이나 동경 일대는 중경에 비해 당의 영향을 더 많이 받은 유물이 나올 것이라 추측해 볼 수 있다.
정혜공주는 말했듯 발해 문왕의 두 번째 딸이며 777년(이때 수도는 상경)에 사망했다. 그의 무덤은 발해의 첫 도읍지인 동모산(돈화시 추정) 부근에 위치해 있다. 묘 비문이 발견돼서 발해가 한문과 유학에 능숙했음을 확인할 수 있고, 발해의 연호와 왕, 공주를 칭하는 칭호, 불교식 왕명 등이 언급된다.
정혜공주 무덤의 중요한 특징은 고구려 양식이다. 삼국시대 무덤의 국룰인 굴식 돌방무덤 양식을 따르고 있으며 모줄임천장[사진에서 점점 좁아지는 천장 구조]이라는 고구려 고분 양식을 가지고 있다. 이런 내용 지식을 통해 우리는 성취기준 상의 아래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1. 고구려 고분 양식 -> 고구려의 계승
2. 연호 사용, 공주 칭호, 불교 도입 -> 통치체제 정비
3. 한문 사용 능숙, 무덤 양식 등 -> 구체적 문화 내용
또한 위치 정보 역시 매우 중요하다.
이에 시호를 정하여 정혜공주라고 하였다. 보력 7년 11월 24일 갑신일에 진릉의 서쪽 언덕에 배장하였으니, 이것은 예의에 맞는 것이다
- 정혜공주 묘지문
정혜공주 묘지문을 보면 "진릉의 서쪽"에 위치했다고 했는데, 여기서 진릉은 2대 발해 무왕의 묘를 말한다. 우리가 조상이 돌아가시면 조상의 활동 지역과 관계없이 선산에 묻는 걸 생각하면 쉽다. 중경과 상경에서 살다가 죽은 정혜공주지만, 조상의 무덤이 있는 진릉 주변에 묻었다고 할 수 있다.
진릉이 정확하게 어느 고분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정혜공주 묘가 출토된 돈화시 고분군이 발해 초기 왕족들의 무덤군이라고 볼 수 있고, 따라서 돈화시가 발해 초기 도읍지인 동모산 일대일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또한 발해의 초기 도읍지인 동모산 일대는 당의 영향을 받은 바 없이 고구려의 색채가 짙게 묻어나는 지역이라는 추론 역시 가능해진다. 그렇기에 정혜공주 묘의 위치는 특히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정효공주는 발해 문왕의 네 번째 딸이며 792년(이때 수도는 동경)에 사망했다. 그의 무덤은 발해의 두 번째 도읍지인 중경(화룡시 추정) 부근에 위치해 있다. 정혜공주 묘 비문 역시 정혜공주 묘와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다. 정혜공주 묘지문보다 더욱 다양한 유교적 수사가 활용되며 문왕의 연호와 '황상'이라는 호칭이 등장한다.
정효공주 무덤의 중요한 특징은 당 양식과 고구려 양식의 융합이다. 우리에겐 무령왕릉으로 유명한 중국의 벽돌무덤 양식으로 만들어졌다. 또한 벽화 역시 뺨이 둥글고 얼굴이 통통한 당의 화풍으로 그려져 있다. 하지만, 정혜공주 묘와 같이 모줄임천장 양식[그중에서도 평행고임 양식]으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성취기준 상의 아래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1. 고구려 고분 양식 -> 고구려의 계승
2. '황상' 칭호, (정혜공주 대비) 진일보된 유교적 수사 활용 -> 통치체제 정비
3-1. 한문 사용 능숙, 무덤 양식, 벽화의 내용 정보 -> 구체적 문화 내용
3-2. 벽돌무덤(당 고분 양식) -> 당나라와의 문화 교류
다음은 위치 정보와 결합이다. 정효공주 묘는 중경(화룡시 추정)에 위치해 있는데, 최근 발해 문왕의 왕비 무덤으로 추정되는 무덤 역시 이곳에 위치함이 밝혀졌다. 모종의 이유로 왕족의 묘역이 중경으로 옮겨간 것으로 보인다. 중경에 위치한 정효공주 묘는 이전과 달리 당의 영향을 여럿 받은 걸로 봐서 중경은 동모산보다 당의 영향을 보다 많이 받은 도시이고, 발해의 중심지가 이동하면서 당과의 문화 교류가 더욱 활발해졌음을 보여준다고 볼 수 있겠다.
화제글에서 문제를 처음 봤는데, 필자도 문제만 봤을 때는 다 알고 풀진 않았다. 구체적인 지명은 "돈화"가 동모산 일대임만을 알고 있었고, 화룡, 영안, 훈춘, 용두산 등의 지명은 발해의 구체적인 어디인지 알지 못했다. 오로지 돈화 = 동모산이라는 사실만 알고 풀었다. 이 사실을 모른다면 ①화룡이 중경임을 알거나 ②영안=상경, 훈춘=동경임을 알아야만 풀리는 문제이므로 상당히 지엽적인 문제라 할 수 있다.
㉠ 돈화는 동모산 일대이므로 정효공주 무덤이 아니라 정혜공주의 무덤이 있는 곳이므로 틀렸다. 따라서 바로 ①과 ②를 날릴 수 있다. 그렇다면 ㉢은 판단할 여지없이 반드시 옳은 선지이다.
나는 용두산 고분군이 무엇을 말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을 판단할 능력이 없으므로 ㉣을 본다. 정혜공주의 무덤은 동모산, 즉 돈화, ㉠에 있으므로 ㉣에 있다는 내용은 틀렸다. 따라서 ㉠과 ㉣이 틀렸으니 정답은 ③이 된다. 돈화가 동모산이라는 사실만 갖고도 운 좋게 풀어낼 수 있었다.
아까 사진에서 한 번 나온 적 있지만, ㉠은 동모산, ㉡은 중경, ㉢은 상경, ㉣은 동경이다. ㉠에서 정효공주 벽돌무덤 벽화로 인물 복식을 탐구하는 건 ㉡으로 가야 하고 ㉡의 용두산 고분군이 바로 정효공주의 무덤이 있는 고분군을 의미한다. ㉢의 오봉루 성문터는 곧 발해 상경의 궁성을 의미하는데, 발해 상경성이 당의 장안성을 모방한 구조임은 유명하다. ㉣에서 찾을 정혜공주 무덤의 고구려 계승요소는 굴식 돌방무덤, 모줄임천장이며 이는 ㉠으로 가서 찾아야 한다.
여담으로 '기출문제'를 통해서 공부를 하기 위해서는, 내가 문제를 풀어놓은 것 같은 과정을 거쳐야 한다. 나는 처음 문제를 풀 때는 ㉡과 ㉢이 맞는 선지인지 몰랐지만, 답을 확인하고 나서는 알 수 있다. 그럼 그다음에 ㉡은 중경성이고 ㉢은 상경성이구나! 용두산 고분군이란 정효공주 묘지가 있는 고분군을 말하고, 오봉루 성문터란 발해 상경성의 성문터를 말하는구나!라고 한번 더 깨닫고 기억하려는 과정이 필요하다. 대부분 학생은 이 과정을 하지 못해서 공부를 잘하지 못한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현재 지명이 아니라 과거의 지명을 제시해주기만 해도 충분히 의미가 있지 않나 싶다. 왜냐하면 나도 현재 지명만 주면 모를 정도로 어렵기 때문이다. 또한 이 내용을 학습하면서 중요한 점은 수도와 발해의 문화유산, 그리고 그 특징과 의의를 연결시킬 수 있는가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수도 이름을 그대로 주면 문제가 너무 쉬워져서 변별력이 떨어지는 문제가 있다.
필자가 '돈화'가 동모산 부근임을 알고 있는 이유다. 이 문제는 객관식 시절에 출제된 문제이다. ③ 보기가 정혜공주 묘의 위치를 묻는 내용인데, 위에서 계속 얘기했듯 정혜공주 묘는 고구려 느낌이 물씬 풍기는 묘이다. 따라서 이는 당과 긴장관계를 유지하던 시기의 수도인 동모산(돈화) 부근에 위치해 있으니 틀렸다.
비록 정혜공주와 정효공주의 사망 시점이 각각 발해의 중심지가 동모산, 중경일 때는 아니다. 하지만 동모산에 위치한 정혜공주 묘는 온전한 고구려 양식이고 중경에 위치한 정효공주 묘가 당의 양식으로 지어진 것은 시사하는 바가 있다. 이는 당과 대립하던 무왕 시기와 당과 화친을 맺은 문왕 시기의 차이, 즉 발해의 천도와 통치체제 정비과정, 당과의 외교적 관계를 간략하지만 명료하게 보여준다. 이 때문에 아마 구체적인 무덤의 위치가 시험에 출제된 것으로 보인다. 발해의 고분군에 대한 문제로 보이기도 하지만, 발해의 수도 변천에 따른 당과의 문화 교류를 묻는 것이 본질로 보이기 때문이다.
또한 두 무덤 모두 고구려 양식이 활용된 것으로 봐서 발해는 고구려를 직간접적으로 계승한 나라임을 확인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문왕 대에 들어 발해의 통치체제가 크게 정비됐음이 묘지문으로 확인되며, 발해인의 문화적 수준이나 풍속 역시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다시 교육과정으로 돌아간다면, 우리는 정혜공주 묘와 정효공주 묘를 통해 발해가 고구려의 계승국이며 신라와 함께 우리 역사의 한 축을 이루었고 삼국의 문화를 계승한 채 당과 문화교류를 통해 독자적 문화를 발전시켜 나갔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다.
시험에 나오는 건 인물, 사건, 유물의 이름이다. 하지만 정말로 중요한 것은 이름이 아니라 그것이 가지는 함의이다. 실제 출제 이유가 변별력일지라도, 명분은 그 함의를 제대로 알고 있느냐? 에 있다. 궁극적으로는 이런 함의를 앎에서 더 나아가, 일련의 '사고방식'을 키워주는 것이 결국 교육의 목표이다.
강봉룡, 『뿌리 깊은 한국사 샘이 깊은 이야기 2: 통일신라, 발해편』, 가람기획, 2016
김태웅 외 9명, 『중학교 역사2(2015개정), 미래엔
구영모, 『2024 선생님을 위한 한국사』, 박문각, 2023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10: 발해』, 국사편찬위원회, 2013
교육부, 초.중등학교 사회과 교육과정, 교육부 고시 제2018-162호(교육부 고시 제2018-150호의 일부개정)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재미있는 초등역사』, 「고구려 문화를 계승한 발해 문화」
동북아역사재단 동북아역사넷, 『고구려-발해 문화유산지도』, 「발해 문화유산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