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절된 기억을 기록하다
내가 머릿속의 잔상을 기록하기로 한 이유.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였다. 수도 정 중앙에 플라자 데 아르마스(Plaza de Armas)라고 불리는 큰 광장이 있었다. 유럽이나, 유럽의 영향을 많이 받은 남미의 대부분의 도시들은 중앙에 큰 광장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몇해 전, 미국에서 산 싸구려 H&M 분홍색 원피스를 입고, 낮은 갈색 로퍼를 신고 있었다.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약속된 기다림은 아니였다. 만나면 좋고, 아니면 어쩔수 없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기다리다가, 기다리다가, 결국 그를 만나지 못하고 헐레벌떡 교회로 갔다.
어느날 갑자기 칠레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던 잔상이 스쳐 지나갔다. 아, 나는 누굴 기다리고 있었던거지? 왜 약속되지 않았던 기다림을 자처한거지? 기억을 더듬고 더듬다보니...기억났다!
그의 이름이 기억났다. 페이스북을 찾아 들어갔고 역시나 우리가 주고받은 메세지가 남아있었다.
우린 대학생때 만났다. 학교에서 운영하는 교내지킴이 아르바이트가 있었는데, 밤에 학교를 순찰하며 위험한 상황이 있는지 두어시간 살피고 돌아가는 활동이었다. 우린 그곳에서 만났다. 밤 산책을 겸한 학교 순찰을 하면서, 그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고 '대나무숲' 같다며 좋아했던 기억도 난다. 우린 각자 졸업을 했고, 각자의 길을 갔다. 그리고 몇년 뒤, 나는 중남미 칠레에서 살게 되었고 그가 남미 여행을 왔다. 그때만해도 여행하면서 실시간으로 SNS를 할 수 있는 환경은 아니었다. '인터넷카페' 라고 하는 곳에 가서 PC방처럼 인터넷을 써야 하는 시대였다. 그는 나에게 페이스북 메세지로 연락을 했고, 나는 현지 휴대폰이 있었기에 바로 답장을 했지만 그는 긴 이동과 열악학 남미의 통신환경 때문에 몇일이 지나야 답장을 할 수 있었다. 나는 '플라자 데 아르마스에서 2시에 기다릴게' 라는 메세지를 남겼다. 그리고 저녁 5시가 될 때 까지 광장에 있었다. 분홍색 원피스를 입고, 하릴 없이 사람을 구경하고 걷기도 하고 성당도 몇 번씩이나 들락날락하며 그를 기다렸다. 중요한 선약이 있었기에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이제 떠난다' 는 메세지를 남기고 광장을 떠났다. 그는 와인 농장에 다녀오느냐 산티아고 외곽에 있었고, 내 메세지를 확인하지 못했다. 그렇게 우린 결국 엇갈렸다.
어느날, 집에서 TV를 보다가 문득 칠레 산티아고의 광장, 내가 입고 있던 분홍 원피스가 떠올랐다. 기억을 따라가니 오래된 내 기억속 사람이 떠올랐다. 그와 오랜만에 연락이 닿았고, 그는 지금 미국으로 이민을 가 일을 하고 있다고 한다. 다시 볼 일은 없겠지만, 기억속의 그는 내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칠레에 와서 나를 찾아주던 따뜻한 사람이었다.
초점없는 눈을 하고 사는 날이 많아졌다. 멍 하게 있다보면 어떤 분명한 기억보다는 분절된 잔상같은 기억이 떠오른다. 마치 한 컷의 스틸샷 같은 느낌인데, 앞뒤 맥락이 잘 기억나지 않다가도 가만히 집중하다보면 생각이난다. 그러면서 잊혀졌던 내 인연들과, 그들과의 따뜻했던 이야기가 떠오른다. 마음이 몽글몽글 편안해진다. 어쩔 때에는 그리운 마음에 울컥하기도 하지만 이내 금방 진정되고 온화함만 남는다.
그래, 나는 머릿속의 잔상을 기록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