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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시대의 역설: 더 피로한 우리

우리는 AI를 제대로 부리는 현명한 주인이 되어야 한다

by 김진영 Emilio

바야흐로 AI 광풍의 시대입니다. ‘AI로 보고서 5분 만에 쓰기’, ‘AI 활용 칼퇴 비법’과 같은 구호가 직장인의 눈과 귀를 사로잡습니다. 인공지능은 이제 단순한 기술적 화두를 넘어, 우리의 일과 삶을 혁신할 구원투수처럼 여겨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뜨거운 열기 속에서, 정작 AI를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이들 사이에서 ‘AI 때문에 더 피로해졌다’는 뜻밖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생산성 혁명의 총아로 불리는 AI가 어째서 우리를 더 지치게 만드는 것일까요? 그 이면에는 ‘가속화의 역설’과 ‘내재적 동기 저하’라는 두 가지 함정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첫 번째 함정: 끝나지 않는 일, ‘가속화의 역설’

AI가 개별 작업의 효율성을 극대화한다는 점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복잡한 데이터 분석, 방대한 자료 요약, 초안 작성 등 과거에는 수 시간, 혹은 수일이 걸렸을 법한 일들이 이제는 단 몇 분 만에 가능해졌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효율성의 증가는 종종 더 많은 업무량으로 귀결됩니다. 이는 기술 발전이 인간의 노동을 줄여줄 것이라는 기대와는 상반되는 ‘가속화의 역설(Paradox of Acceleration)’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과거의 사례를 돌아보면 이 현상을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 세탁기의 등장은 손빨래의 고됨에서 우리를 해방했지만, 그 결과 일주일에 한 번 하던 빨래를 매일 하게 되었습니다. 이메일은 편지를 쓰고 부치는 수고를 덜어주었지만, 이제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 수백 통의 이메일을 확인하고 즉각 답해야 하는 압박에 시달립니다. 기술은 특정 작업의 속도를 높였지만, 동시에 그 작업에 대한 사회적 기대치와 수행 빈도를 함께 끌어올린 것입니다.

AI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AI의 도움으로 보고서 하나를 1시간 만에 완성하게 되면, 남는 시간을 휴식으로 채우는 대신 또 다른 보고서를 작성하거나, 기존 보고서의 완성도를 ‘AI의 힘을 빌려’ 극한까지 끌어올리라는 무언의 압박을 받게 됩니다. 캐나다 토론토 대학의 경제학자 아제이 아그라왈(Ajay Agrawal) 교수는 그의 저서 《예측 기계(Prediction Machines)》에서 AI를 ‘예측 비용의 급격한 하락’으로 정의했습니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특정 기술의 비용이 저렴해지면 우리는 그 기술을 훨씬 더 자주, 그리고 광범위하게 사용하게 됩니다. AI가 데이터 분석과 콘텐츠 생성의 비용을 극적으로 낮추면서, 기업과 개인은 과거에는 엄두도 내지 못했을 양의 분석과 콘텐츠 생산을 당연하게 여기게 된 것입니다. 결국, 개별 업무의 효율은 높아졌지만 전체 업무의 총량은 줄어들지 않거나 오히려 늘어나면서, 우리는 끊임없이 가속되는 업무의 쳇바퀴 위에서 번아웃을 향해 달려가게 됩니다.


두 번째 함정: ‘내 것’이 아닌 성과, ‘내재적 동기 저하’

AI가 야기하는 피로감의 두 번째 원인은 심리적인 측면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바로 ‘내재적 동기(Intrinsic Motivation)’의 저하 문제입니다. 한두 번 재미 삼아 AI의 도움을 받는 것은 신기하고 즐거운 경험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업무의 상당 부분을, 특히 핵심적인 사고와 판단이 필요한 영역까지 AI에 의존하게 되면 문제는 달라집니다.

심리학에서 ‘자기 효능감(Self-efficacy)’은 개인이 어떤 과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는 자신의 능력에 대한 믿음을 의미하며, 이는 성취감과 직업 만족도의 핵심적인 요소입니다. 하지만 AI가 생성해준 결과물을 약간 수정하여 제출하는 과정이 반복되면, 우리는 점차 ‘내가 이 일을 해냈다’는 통제감과 성취감을 잃게 됩니다. 결과물의 품질과는 별개로, 문제 해결 과정에서 자신의 지식과 기술을 발휘하고 어려움을 극복하는 경험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이는 곧 자기 효능감의 저하로 이어집니다.

이러한 상황이 지속될 경우, 우리는 ‘노동 소외(Labor Alienation)’ 현상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는 카를 마르크스가 지적했던 개념으로,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 과정과 결과물로부터 분리되어 통제력을 상실하고, 일 자체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게 되는 상태를 말합니다. AI가 내놓은 결과물은 나의 것이 아닌, AI의 것이라는 인식이 싹트는 순간, 우리는 자신의 업무에서 주인이 아닌 단순한 ‘AI의 보조자’로 전락하게 됩니다. 일은 끝냈지만, 그 과정에서 얻는 성장과 보람은 희미해지고 피로와 공허함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단순히 일이 많고 힘든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일의 의미와 정체성을 위협하는 문제입니다.


똑똑한 AI의 ‘현명한 주인’이 되는 법

그렇다면 우리는 이 역설적인 상황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요? AI라는 강력한 도구를 폐기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핵심은 AI에 대한 맹목적인 의존에서 벗어나, ‘효율성’을 넘어 ‘효과성’의 관점에서 AI 활용 전략을 재정립하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는 AI에게 ‘무엇을 맡길 것인가’를 명확히 구분해야 합니다. 단순 반복적인 자료 수집, 초안 작성, 데이터 정리 등은 AI에게 적극적으로 위임하여 시간과 에너지를 확보해야 합니다. 하지만 확보된 시간을 더 많은 ‘단순 작업’으로 채우는 것이 아니라, AI가 할 수 없는 고유의 인간 영역에 집중적으로 투자해야 합니다. 즉, 새로운 문제를 발견하고 정의하는 ‘문제 제기 능력’, 데이터 너머의 맥락을 읽고 핵심을 꿰뚫는 ‘비판적 사고’, 동료들과 공감하고 협력하며 시너지를 창출하는 ‘정서적 소통 능력’, 그리고 복잡한 상황 속에서 최적의 대안을 선택하는 ‘가치 판단과 의사결정 능력’이 바로 그것입니다.

결국 AI 시대의 진정한 경쟁력은 AI를 얼마나 ‘잘 쓰느냐’에서 더 나아가, AI를 통해 확보한 시간을 얼마나 ‘가치 있게 쓰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AI를 task(과업)르 대신 처리해주는 하인이 아니라, 나의 창의성과 전문성을 더욱 빛내주는 파트너로 인식하는 관점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AI가 생성한 결과물을 맹신하고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자신의 고유한 아이디어와 통찰을 더하여 ‘나만의 결과물’로 재창조하는 주도적인 자세가 요구됩니다.

AI는 우리에게 더 빨리, 더 많이 일할 수 있는 능력을 선물했지만, 그만큼 우리의 일과 성장의 의미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가속의 함정과 동기 저하의 늪에 빠지지 않고 AI 시대의 파도를 현명하게 넘기 위해서는, 기술에 매몰되지 않고 인간 고유의 가치를 더욱 단단히 붙잡으려는 의식적인 노력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합니다. AI는 그럴싸운 답을 제시할 수 있지만, 무엇을 물어야 할지, 어떤 답을 결정할지, 그 답을 어떻게 활용할지는 여전히 인간의 몫으로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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