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론 나를 돌아보는 쉼표가 필요하다

팀장으로 산다는 것 #17

by 김진영 Emilio

A는 어릴 적 친구입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아버지 고향으로 이사를 했죠. 간간이 연락하다 대입을 앞두고 고민이 있다고 했습니다. 성적은 충분히 되는데, 집안 사정상 서울로 대학가긴 힘들겠다는. 어릴 적 이사도 그런 연유라는 걸 알게 됐죠. 결국 그 친구는 지방 국립대학에 4년 장학생으로 입학했습니다. 저보다 몇 배는 더 똑똑한 친구였는데, 능력이 아까웠습니다. 본인도 서울로 오지 못한 것이 큰 열등감으로 남았던 모양입니다.


대학을 졸업할 때쯤, 누구나 알만한 대기업에 입사했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대학으로는 상경을 못 했지만, 직장으로는 상경했다는 자부심이 대단하더군요. 그 후 남보다 승진이 빠르고, 직장인 친구들 사이에서 제일 먼저 '1억 연봉'이 됐다는 소식도 알려왔습니다. 아이 둘에 와이프까지, 남들 보기엔 완벽한 생활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연락이 잘 안 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땐 바빠서 그랬거니 생각하고 말았죠. 어느 날 갑자기 전화가 왔습니다.


"지금 잠시 볼 수 있을까?" 몇 년 만에 전화인데 첫마디가 그랬습니다.


그 잠시는 무려 세 시간이나 이어졌죠. 격정 토로랄까. 그 모습은 마치 비 맞고 맞으며 맹수에 쫓기다 겨우 살아난 토끼처럼 안쓰러워 보였습니다. 그 친구 말을 정리하자면 이랬습니다.


- 지방대 출신인 자신을 인정해주는 회사에 감사해서 혼신을 다했고, 실적이 좋아 인정도 받았다.

- 3년 전부터는 팀장으로 승진해서 일하고 있다. 문제의 시작은 그때부터였다.

- 처음 '장'이 된 만큼 본인의 목소리를 내려고 했었다. 그런데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더라.

- 상사인 상무가 불러서 왜 그렇게 변했냐고 다그쳐 물었다. 팀원들도 상무 눈 밖에 난 자기를 팀장으로 여기지 않는 분위기다.

- 의욕이 떨어지니 육체적 피로가 누적돼서 물에 젖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는 것 같다. 매일 아침 출근이 괴롭다. 이런 게 '번아웃'인 걸까.

- 퇴사를 고민 중이다. 급작스런 상황에 와이프는 놀라고 불안해한다.


"나 어떻게 하면 좋을까?"

"글쎄... "


'내가 뭐라고 조언을 할 수 있나.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감정적인 공감 정도가 아닐까.'

머리가 복잡했지만, 친구라 오지랖을 떨어보기로 했습니다.


"OO아, 너 지난주 동안 어디서 누구랑 어떻게 시간을 보냈는지 말해볼래?"

"뭐라고?"

"그냥 알고 싶어. 그래야 내가 뭐라도 도움 되는 얘길 해줄 수 있을 것 같아."


-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집-회사를 왔다 갔다 했고, 3일은 9시 넘어까지 야근을 했다.

- 토요일은 사내 등산 동호회 사람들과 관악산 등반을 하고, 술 한잔했다.

- 일요일엔 늦잠을 자고, 와이프와 마트에서 장을 보고 영화를 봤다.


"그래, 알았어. 너는 집, 회사, 산, 마트, 영화관에 있었네. 가족, 직장동료들하고 만났고, 그렇지?"

"그런 거지."

친구는 심드렁하게 대답했습니다.


"아마도 지난주만이 아니라 지지난 주도, 그 이전도 비슷했겠지?"

"그.. 그랬었지."

"내 생각엔 넌 열심히 살아왔어. 근데, 그건 회사를 위한 거였지. 그냥 회사 기준에 맞춰 잘 살아왔다는 거야. 이제 여유가 생기니까 '잠자고 있던 너'가 깨어난 거야. 너답고 싶었던 시간을 보상이라도 해달라는 것처럼."


"일이 안 되니까 심리적으로 위축되고, 컨디션도 안 좋아지고, 그러다 보니 팀원들하고 관계도 나빠지고. 그래서 자괴감에 빠진 것 같아. 다만, 그건 '일'이잖아. 너를 설명하는 '일부'일 뿐이라고. 그게 뭐라고 널 이렇게 망치고 있니."


한동안 멍하니 나를 바라보던 친구는 이내 고개를 떨궜습니다.


친구의 갑작스런 전화

최근 인사 담당 퇴직 임원분과 얘기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몸담았던 기업이 원하는 인재상에 관해 솔직하게 말씀해주셨습니다. 요즘 지원자들 대부분 스펙은 갖추고 있으니, '충성심'이 높은 인재를 고르는 것이 우선순위 No.1이라고 했습니다. 일반 인재는 '벽돌'로 비유하시더군요. 어디 둬도 무난히 그 일을 처리할 수 있는 사람. 그런 인재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Q. 그 회사는 요즘 자율성과 창의성을 강조하던데요?

A. 그거, 중요하죠. 하지만 결정은 '위'에서 합니다. 직원들은 그걸 묵묵히 실행하는 게 필요한 거고, 오로지 결정을 처리하는 범위 안에서 자율성과 창의성이 필요하다 하겠습니다.


Q. 원하는 직원을 '벽돌'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개성을 존중하는 요즘 세대들한테도 가능한 것인가요?

A. 물론 예전 시대처럼 '까라면 까라'는 식으로는 접근할 수 없습니다. 좀 더 유연하고, 지능적으로 접근해야죠. 코로나 사태에도 불구하고 최근 들어 교육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관련 예산과 시간이 늘리고 있어요. 아울러 자발적인 학습조직이나 취미 동호회 등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습니다. 일뿐만 아니라 그 외 활동으로도 회사와 직원을 연결하려고 노력하는 거죠.


Q. 충성심이 높은 인재를 확보하고 유지하는 비결이 있나요?

A. 사실 우리 회사는 SKY 출신 비율이 비교적 낮습니다. 80%를 차지하는 '일반 인재'로서 SKY 출신들은 적합하지 않다는 게 결론이에요. 차라리 우리 회사에 입사한 걸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우리 회사에서 오래 근속하고 성과도 나쁘지 않다는 게 공개되지 않은, 오랜 경험칙입니다.


'아... 내 친구도 이런 사람이었구나. 회사에 감사하며, 어디서나 자기 역할을 다할, 충성도 높은 벽돌.'


기업이 원하는 인재상

'나는 열심히 살고 있는가'라는 강박 의식을 갖는 직장인들이 많습니다. 동기부여라는 명분으로 자기개발서적, 유명연사들은 우리에게 나태라는 죄의식을 심어주길 주저하지 않죠. 제 친구처럼 '팀장'을 달 정도의 사람이라면 열심히 살아왔을 겁니다. 회사에서 인정받고 충성심도 올라가고, 그러다 보면 나와 회사의 구분이 희미해집니다. 결국엔 회사와 자신을 동일시하게 됩니다. 그러고 보니 친구는 SNS에 자사 제품 사진을 누가 올리면 '써줘서 고맙다'는 댓글을 달곤 했습니다. 가볍게 볼 일이 아니었네요.


팀장이 됐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10~15년 이상의 경력을 쌓았다는 것입니다. 직장인의 현실적인 퇴직 연령이 50대 초반임을 고려한다면, 중간 반환점 부근에 서 있는 거죠. 누구나 느낄 수 있는 번아웃까지는 아니더라도, 반복되는 일상에 나 자신이 소진된다는 느낌도 들 수 있습니다. 그때가 바로 '나를 돌아보는 쉼표'가 필요한 순간이 아닌가 싶습니다.


반환점에서 선 팀장의 삶

유명한 경영 컨설턴트이자 경제학자인 오마에 겐이치는 인생을 바꾸기 위해선 세 가지를 바꿔야 한다고 했습니다. 첫째, 보내는 시간, 둘째, 만나는 사람, 셋째, 지내는 공간. 사실 이 세 가지가 떠올라서 친구에게 질문한 거였습니다.


보내는 시간은 활동을 의미합니다. 평일에는 직장, 주말에는 가정. 대다수 직장인의 일상일 것입니다. 거기에 한 가지만 본인이 하고 싶은 것을 추가해보면 어떨까요? 매일은 어렵다면 주에 한 번 정도라도 괜찮을 겁니다. 예전 제 후배는 주말에 요리학원을 다닌다고 했었습니다. 번듯한 회사에 다니는데 웬 요리? 다들 한마디씩 했는데, 지금은 어엿한 오너요리사가 돼 있습니다. 직장 다닐 때보다 몸은 힘들지만 몇 배는 더 즐겁다고 합니다.


만나는 사람은 활동과도 연관이 있습니다. 대개 다른 활동을 찾아야 새로운 사람을 만날 수 있으니까요. 나이가 들면 익숙한 사람들만 만나는 경향이 있습니다. 다만 편안한 사람들과는 '과거'가 주된 얘깃거리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전 한국의 피자왕이라고 일컬어지던 '성신제'라는 분이 있습니다. 비록 여러 차례 사업에 실패했지만, 한국 프랜차이즈 업계의 살아있는 전설이죠. 연세가 칠순이 넘었는데도, 사업적으로 어린 친구들과 만남에 설렘을 느낀다고 합니다.


"제 나이 또래 친구들하고 잘 안 만나요. 미래에 대한 얘기는 없고... 전부 앉아서 '옛날에 네가 어찌 됐냐, 내가 어쨌냐' 같은 옛날 얘기만 하잖아요." (SBS 스페셜 478회)


91653669.1.jpg 성신제 대표


지내는 공간 바꾸기는 단기적으로 쉽지 않습니다. 사는 집과 직장이 주된 공간인데 금세 어떻게 바꾸겠습니까. 단기적으로는 쉼표를 실행할 수 있는 작은 공간을 가져보시길 권해드립니다. 저는 집 근처에 스터디카페에 종종 들립니다. 주로 생각을 정리하거나 글을 쓸데 조용한 분위기에서 집중할 수 있어 선호하는 편입니다. 이처럼 거창하게 여행을 떠나는 건 아니지만 일상에서 잠시 떨어져 있을 공간은 주변에 많이 있다고 봅니다.


모든 것이 너무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 우리는 압축적인 성장을 강요받았는지도 모릅니다. 앞만 보고 달려왔는데, 이 방향이 맞는 줄 알고 뛰어왔는데 어느 순간 아닌 것 같기도 합니다. 너무 내달리다 보면 방향이 잘못 됐다는 걸 알아도 돌아오기 힘들 수 있습니다. 속도보다는 언제나 방향이 더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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