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티탭을 사러 갔다가 책을 한 권 샀다

무해한 나의 일기

by just E

제주에 살다가 보면 의외로 날씨 좋은 날이 그렇게 많지 않다.

그렇게 많지 않다는 건 보통 내가 쉬는 날인 주말을 전제조건으로 한다.

출근을 하던 중 도로 위 차량 정체가 있을 때면 자연스레 주변을 둘러보게 된다.

그럴 때면 배낭을 메고 비바람을 뚫고 하염없이 어딘가로 걷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언제쯤엔 ‘저 사람들은 여행객일 텐데 하필이면…. 날씨가 좋았다면…‘하는 안타까움이 들었다.


안타까움이란 특정 대상에게만 발생하는 상황이 아니라 랜덤 게임 같은 거라는 걸 나는 미처 알지 못했다, 그때는


벚꽃은 만개했고 쾌청한 제주의 주말이다.

나는 차가 없다. 그러니깐 나는 차가 있었지만 쉬는 날인 지금 하필이면 차가 없다.

오늘은 주일이고 미사가 있는 날이다. 미사의 불참이 고해소에 들어가 신부님과 나 사이에 닿지도 않을 서먹한 공기의 흐름을 온몸으로 느끼며 고해성사를 해야 하는 죄가 아니었다면 아마 오늘도 집 밖에 나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보통 고해소 안에는 신부님과 신자 사이에 서로가 보이지 않는 칸막이가 되어 있다)


막상 집 밖을 나와 오랜만에 버스를 탔더니 거의 죽어가던 여행 세포가 꿈틀 한다.

미사를 드리고 돌아오는 길 그냥 돌아가기엔 뭔가 아쉽다. 걷기로 한다.

‘남들은 비싼 항공료 내고 올레길을 걸으러 제주에 오는데 3킬로쯤이야.’라는 생각이 들었다.

실리 추구가 우선인 사람에겐 걷는데도 명분이 필요했고, 마침 멀티탭이 필요했으니 그걸 사서 들어가면 ‘하필이면’의 날이 랜덤 게임에서 ‘오히려 좋아’를 뽑은 격이 된다.

코에 걸고 귀에 건 의미 부여는 기분을 좋게 만들었다.

커피를 마시면 한층 더 여행처럼 하루를 보낼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심심하던 어느 날 저장해 뒀던 한 번쯤은 가 보고 싶던 카페에 간다. 커피와 샌드위치를 주문한다.


처음부터 오늘 계획에는 커피도 멀티탭도 없었던 하루였다. 그러니 부피와 무게 때문에 짐스러워질 책을 사지 않은지 꽤 오래인데 언젠가는 떠날 제주에서 굳이 하나의 짐을 더 추가한다고 해서 하나의 변수를 더 하는 행위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

요즘 자주 드는 생각은 ‘고민의 시간을 차라리 저지르고 난 후 수습의 시간으로 대처하는 게 낫다’라는 결론에 이른 나다.

예쁜 것은 죄가 없고, 그게 가치의 본질을 퇴색해 버렸다고 해서 그렇게 나쁠 것도 없었다.

여행지에서 산 마그네틱이 집에 돌아와 그저 냉장고나 현관문 한편을 장식하는 의미 그 이상은 아니듯 그 물건의 본질을 잃었다고 해서 나에게까지 의미를 잃은 건 아니다. 어느 날 ‘아, 이 책은 날 좋은 봄에 샀었지 ‘하고 여행처럼 기억되리라 생각한다.

오늘은 날씨가 참 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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