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등짝을 딱! 때려주고 싶어
12 / 등짝을 때려주고 싶은 순례자
전화상담을 하다보면 낯익은 목소리가 생긴다. 상습 전화자, 되풀이 전화자이다(전화를 걸어오는 내담자를 전화자라고 부른다).
“오늘 비가 오는데 노란 옷이 괜찮을까요?”
“고양이가 밥을 안 먹어요. 왜 그런가요?”
“자기들 끼리 속닥거리다가 저만 가까이 가면 다들 피해요. 왜 그러지요?”
“오늘은 소화가 안 되네요. 산책이 좋을까요, 아님 약 대신 사이다를 마실까요?”
“저는 대학을 나왔는데 옆집은 고졸이지요. 말 안 해도 내가 다 알아요. 그 여자가 저를 무시하는데 어떻게 할까요?”
“우울이 심해요, 부모님들이 남동생만 예뻐해요. 제가 몇 살이냐구요? 올해 꼭 마흔이요.”
상습 전화자일수록 호소하는 내용이 대동소이하다. 편하게 생각하면 될 것을 굳이 전화를 해서 물어본다. 그렇다고 무슨 뾰족한 답을 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워낙 자주하는 사람과는 ‘친밀감’도 생긴다. 의례적인 인사도 생략하고 대화를 나눈다. 어떤 때는 시큰둥하게 단답식으로, 또 어떤 때는 ‘오죽하면 저러겠냐’는 측은지심으로 30분 이상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전화상담 순례자가 있다. 편한 시간, 편한 자오에서 번호만 누르면 되기 때문에 순례가 얼마든지 가능하다. 몰라서 그렇지 상담 전화를 운영하는 곳이 의외로 많다. 법률, 도박이나 마약 등 중독, 에이즈 등 의료, 고용/산재, 채무, 성문제, 가출, 이혼 등 전문적인 상담전화도 많고 청소년, 미혼모, 자살 유가족, 정신 질환자 등 유형별 맞춤 상담전화도 있다. 종교단체에서도 상담전화를 운영한다.
이를 잘 아는 사람들은 거의 매일이다시피 순서대로 전화를 걸어 자신의 아픔(진짜인지 의심이 되는)을 호소한다. 순례를 하면서 자신만의 점수를 매겨서 친절하게 응대하는 곳을 더 자주 찾는다.
그런 걸 다 알지만 무성의하게 응대할 수 없다. 어찌 생각하면 이들이야말로 ‘진짜’ 아픈 사람들이어서 전문 상담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실은 이들을 받아줄 만한 상담기관/전화가 드물다. 정부나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정신상담 전화나 자살 상담전화는 조금 냉정한(?) 편이다. 긴급 상황이 아니면 짧은 시간에 마무리하려 든다. 찾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순례자로서는 불만이 많을 수밖에 없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정부에서 이런 사람들을 응대하는 전문상담전화를 적극 운영했으면 좋겠다. 2020년 우리나라 자살자수는 1만3천 명 가량이니 작년 한 해에만 1개 사단 이상의 인력 손실이 생긴 것이다. 새 생명을 태어나게 하는 정책에 수십 조 원의 돈을 쏟아 붓고 있는데 그중의 10%만이라도 이런 사람들을 위해 투자하면 어떨까. 시간 낭비, 예산 낭비가 따르기는 해도 이왕 태어난 사람들을 안 죽게 하는 것도 인구정책에 필요한 일 아니겠는가.
그나저나, 순례자들이여! 전화상담 말고 다른 순례를 하시면 어떻겠는가. 동네 산책이나 어려운 이웃을 찾아 봉사하는 그런 순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