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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페이지 Aug 19. 2020

역주행

2020. 8. 16. 일 / 243 days / 7개월 아기 육아일기

낮 기온이 30도를 웃도는 건 이제 일상이 되어버렸어. 비가 한참 올 때는 시원하기라도 했는데. 마른하늘은 견디기가 힘들어. 폭염주의보가 내린 휴대전화기를 보고 있자니 에어컨 아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야. 조금이라도 에어컨을 덜 틀고 싶지만 다인이를 위해선 그럴 수 없었어. 24.5도가 넘어가면 자지러지니 원. 작년까지만 해도 엄마와 아빠의 실내온도 기준은 28도였어. 그러던 우리가 실내온도 24도에 적응하다니. 너로 인해 바뀐 것이 여기도 하나 있었네.


방문 하나 차이로 쾌적함이 달라져서 우린 오늘도 침실에서 시간을 보냈어. 거실로 나갈 엄두가 들지 않았거든. 나중에 다인이의 영상과 사진을 돌려보면 이 즈음의 것들은 대부분 침실에서 찍은 것들 일정도로 우린 침실 붙박이가 되었어. 이 곳에 머무는 일에는 장점이 있기도 해. 사방이 막힌 공간에 바닥엔 안전하게 매트가 깔려있어 잡고 일어서서 빙글빙글 트랙처럼 돌아다니기에 좋다는 거지. 얼마 전부터 벽을 잡고 일어서는 것은 물론 잡고 걸어 다니기까지 하니까 말이야.


벽을 잡고 움직일 때 다인이는 오른쪽 방향을 향해 움직여. 오른손잡이라서 그런 걸까? 독 오른 방향을 향해 돌진하는 모습 재밌고도 인상적이야. 신생아 때 엄마가 안아주면 고집 있게 한쪽 방향으로만 고개를 돌리더니 지금도 그런다 싶어. 그러려니 하고자 하니 갑자기 왼쪽 방향으로 빛의 속도로 움직여 오더라. 잡고 서서 걸을 때는 천천히 걸음마를 연습하는 느낌으로 걸어가던 네가 갑자기 말이야. 그렇게 돌진하듯 와서는 엄마의 휴대전화에 달린 끈을 만지겠다고 허우적대다가 손에 넣지 못하자 내놓으라고 짜증을 피우다가 울음보를 터뜨렸어. 으이그 성질은! 엄마에게 너의 도약을 감상할 시간을 좀 줄 수 없겠니?


집에만 있자니 지루해 엄마 아빠와 다인이는 마트로 향했어. 배도 고프고 냉장고 속의 식량도 떨어져 갔거든. 딱 이삿날까지 먹을 식재료만 사겠다며 순두부, 콩나물, 등 몇 가지 살 것들을 정하고 마트로 떠났어. 그리곤 늦은 아침식사부터 해결했지. 이사 전 이 도시에서 마지막으로 마트에 오는 날이라며 괜스레 감성에 젖을 건 또 뭐람. 이것도 기념이니 그동안 한 번도 찾지 않았던 푸드코트에서 밥을 먹기로 했어. 세 개의 매장이 나란히 각자의 메뉴를 자랑 중이었어. 찬찬히 메뉴판을 읽고 보니 일식집의 돈가스도 먹고 싶고 스테이크 덮밥도 먹고 싶고 한식집의 고등어구이도 먹고 싶고 된장찌개도 먹고 싶더라. 두세 번 왔다 갔다 하다 도저히 안 되겠어서 아빠에게 말했어. 다 먹고 싶다고. 아빠는 고등어구이를 먹자고 하더라. 저녁에 스테이크 덮밥을 만들어주겠다고 재료를 사서 집에 돌아가쟤. 세상에. 아빠는 천사님인가 봐 다인아.


마트를 휘리릭 돌아보고 집에 도착하니 녹초가 되어버렸어. 냉장고에 식재료들을 급히 정리하고 다인이 밥을 먹이고 한 숨 재우고. 평소 같은 일들을 이어가다 보니 금방 저녁시간이 되었어. 아빠가 약속한 스테이크 덮밥의 시간이 되었다는 뜻이지.


다인이가 푹 잠든 덕분에 아빠가 만든 요리를 천천히 맛볼 수 있었어. 움푹한 그릇에 밥을 얹고 잘 구운 스테이크를 편 썰어 올린 후 파를 송송 썰어 데코레이션을 해놓은 한 그릇 정식이 엄마 앞에 놓였어. 방문을 나설 때부터 코를 싸쥐는 구운 고기의 향이 더욱 진하게 엄마를 자극했어. 잘 먹겠습니다. 숟가락을 들어 밥 고기를 함께 푹 퍼서 입으로 냠냠.


지금까지 먹어본 고기 덮밥 중에 제일 맛있었어.


고기 덮밥의 역사를 새로 쓴 날이야. 먹어본 맛인 줄 알았는데 모르는 맛이었거든. 이것이야말로 고기덮밥의 지붕킥. 차트인. 역주행. 오늘부터 시대는 고기덮밥의 것이라 명한다.


다인이는 걸음을 역주행하고 아빠는 음식을 역주행시다고 오늘을 끼워 맞춰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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